살아있는 자연은 잠시도 쉬지 않고 움직인다. 바람이 불고, 물이 흐르고, 생명의 우렁찬 함성은 쉼 없이 이어진다. 오직 죽어 웅크리고 있는 것만이 요지부동으로 변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변한다는 것은 열려 있다는 것이요 우주 만물과 더불어 호흡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자연의 아름다운 질서요 삶의 경쾌한 리듬이다.
선조 2년 판중추부사 이황(李滉)이 문소전(文昭殿)에 모셔져 있는 여러 위패의 자리를 바꿀 것을 건의하였으나 임금은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또한 조정의 대신들도 반대를 하였다. 그것은 ‘140년이나 지난 것인데 지금 만약 이를 개편한다면 조종(祖宗)의 혼령들도 틀림없이 놀랄 것’이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이이(李珥)는 이 이야기를 듣고 <석담일기(石潭日記)>에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지금 일하려는 자들은 그 계책이 잘못되었다. 만약 무슨 일을 하려 한다면 변혁이 있어야 하는 것인데, 지금 140년간 시행된 이 한 가지도 못 고친다면 140년간 시행되어온 법은 어떻게 고치겠는가. 궁(窮)하면 변(變)하고 변하면 통(通)한다 하는데, 지금은 궁해도 변하지 못하니 어찌 될는지 모르겠구나.”
그러나 끝내 이황의 청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 해 3월 이황은 병을 이유로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이이는 선조의 곁에서 직언을 서슴지 않았다. <석담일기>에는 그 내용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선조 7년 승지로 있던 이이는 여러 차례 임금에게 궁리(窮理)와 역행(力行)을 강조하면서 다음과 같이 아뢰었다.
“전하께서 진정 무슨 일을 하고자 하신다면 모름지기 구습(舊習)에만 따르는 폐단을 통절히 개혁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사람이란 누구나 수구(守舊)를 편히 여기고 개신(改新)을 꺼려하여 ‘오늘 행한 것을 어떻게 내일 갑자기 변경시킬 수 있겠는가’하고 생각합니다. 이처럼 고식적으로만 처하기 때문에 점점 구제하지 못할 지경에까지 이르는 것입니다.”
이이의 지적대로 구습을 따르는 것은 아주 편하다. 그러나 구습이 이미 몸에 맞지 않고 상황에 어긋난다면 과감히 버리고 새로운 대안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변하는 상황에 대한 대응 방식이다. 과거의 잣대, 과거의 논리만을 고집하고 그것을 절대시 한다면 삶의 변화에 올바르게 대처할 수 없게 된다.
변화야말로 우주 자연의 본래 모습
시대와 상황을 초월하여 삶의 진실은 어디에서든 빛나게 마련이다. 은린처럼 반짝이는 진실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망설임 없이 그것을 끌어안을 수 있는 용기를 지녀야 한다. 어두컴컴한 역사의 뒷전에서 고답적인 논리만을 움켜쥐고 그것만이 절대적인 진리인 양 맹신해서는 안 된다. 버리지 않는 자는 결코 새로운 삶의 국면을 만날 수 없다.
기성세대는 흔히 새로운 세대의 행동 양식을 보고 이해할 수 없다는 말을 자주 한다. 우리가 자랄 때는 저러지 않았는데 하며 혀를 차고 못마땅하게 여기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과거의 잣대로 젊은 세대를 판단하여 일방적으로 매도하기가 일쑤다.
이것이 바로 진부하고 고답적인 행동 양식이다. 개중에는 젊은세대의 행동과 사고를 이해하고 수용하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어른들은 자신들의 판단 기준을 쉽게 포기하지 않는다. 그들은 30년 전의 20대와 오늘날의 20대를 동일선상에 놓고 판단하는 것이다.
그러니 거기에 갈등과 대립이 생기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30년 전과 오늘날이 다른 것은 지극히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이다. 이것을 수용하지 않고 오직 정지된 관점에서만 상황을 보니까 이상하고 그릇된 것으로 보이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배에서 칼을 물에 떨어뜨리고, 뱃전에 그 위치를 표시해 놓았다가 나중에 그 칼을 찾으려 했던 사람만큼이나 어리석다.
물은 쉼 없이 흐르고, 배는 이미 칼을 떨어뜨린 자리에서 크게 멀어졌다. 그러나 이 단순한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이러한 어리석음은 구습에 얽매여 사물의 본질을 외면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변하는 것을 변하지 않는 것으로 오인하여 자기의 고집에 사로잡히게 되면 미혹(迷惑)은 끝없이 계속된다.
궁하면 변하고 변하면 통한다는 단순한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변화야말로 우주 자연의 본래 모습이다. 궁해도 변하지 않는다면 그는 삶의 대해(大海)로 나아갈 수 없다. 조선 선조 때 이이가 가장 답답하게 여겼던 것이 변화를 두려워하는 대신들의 자세였다. 그는 줄기차게 임금과 대신들에게 변(變)하면 통(通)한다는 사실을 수차례 강조하였다. 그러나 이이의 주장은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오늘날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다. 자신이 갖고 있는 하나의 판단기준만을 고집해서는 안 된다. 그 기준은 가변적인 것이지 절대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변화를 두려워하는 것은 그만큼 자신이 닫혀 있다는 증거이다. 지금 이 순간도 우주만물은 쉼 없이 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