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한 구석에서 또는 민간에 떠돌던 옛 이야기 속에서 우리는 명쾌하고 재미있는 판결의 예를 찾아볼 수 있다. 어느 새댁의 이야기다. 혼인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시어머니가 죽고 남편은 시묘살이를 떠났다. 남편이 집을 떠나자 평소 새댁을 마음에 두고 있던 이웃집 사내가 자주 집 근처를 배회했다. 그는 갓 혼인한 새댁의 미모에 반하여 그녀에게 은근한 연정을 품고 있었다. 우연히 집 앞에서 마주치면 사내는 우뚝 서서 새댁을 뚫어지게 바라보면서 웃음을 흘렸다. 그러면 새댁은 몸 둘 바를 모르고 얼굴을 붉히며 집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혼자 지내고 있는 터라 겁도 나고 사내를 보면 공연히 가슴이 쿵쿵거리곤 했다.
2년이 다 지나도록 남편은 한 번도 집에 찾아오지 않았다. 혼례를 치른 지 보름 만에 상을 당하여 남편의 얼굴도 몇 번 보지 못한 새댁은 남편의 모습을 점점 잊어가고 있었다. 어느 날 이웃집 사내는 상복을 구해서 입고 한밤중에 새댁의 집으로 살금살금 숨어들었다. 잠을 이루지 못하고 이리저리 뒤척이고 있던 새댁은 사람의 발자국 소리에 잔뜩 겁을 먹고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살며시 방문이 열리고, 누군가가 성큼 방안으로 들어왔다.
“누, 누구세요?”
“부인, 나요. 불 켜지 말고 그냥 있어요. 다른 사람들이 알면 시묘살이 하는 사람이 집에 찾아왔다고 욕을 할 거요.”
“그런데 이 밤중에 어쩐 일이세요?”
“부인이 보고 싶어 왔소.”
사내는 와락 새댁을 끌어안고 모로 쓰러졌다. 너무나 갑작스럽고 예기치 않은 일이어서 새댁은 정신이 없었다.
혼미한 가운데 첫닭의 울음소리를 들었다. 사내는 희미한 어둠속에서 주섬주섬 다시 상복을 걸쳐 입고 아무 말 없이 밖으로 빠져 나갔다. 그 날 밤 새댁은 아이를 갖게 되었고, 열 달 후 아이를 낳았다. 3년 시묘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남편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니, 이 아이는 누구요?”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저 아이는 당신 아이예요. 지난 해 겨울에 당신이 한밤중에 왔다 갔잖아요.”
“뭐요? 내가 언제 여길 왔다 갔다는 거요?”
새댁과 그의 남편은 서로 어이가 없었다. 서로 왔다, 안 왔다 실랑이를 하며 두 사람은 험한 상황으로 치달았다. 결국 둘은 헤어지게 되었다. 남편은 자기 아내의 부정을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다.
집에서 쫓겨나다시피 한 새댁은 오갈 데가 없었다. 그녀는 너무 억울하고 분해서 고을 원님을 찾아가 하소연하였다. 원님은 새댁의 이야기를 듣고, 어렴풋이 일의 윤곽을 짐작하였다.
며칠 동안 고심한 원님은 고을 곳곳에 방을 붙였다. 사람들은 오며가며 그 방을 보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곡소리 안 들은 상복을 가져오면 5천 냥을 주겠다? 거 참, 이상한 방도 다 보겠네.”
“세상에 곡소리 안 들은 상복이 어딨어? 원님의 장난이 너무 심하구먼.”
수군거리는 사람들 사이에서 방을 쳐다보고 있던 이웃집 사내는 눈이 번쩍 뜨였다. 그는 지난 겨울 상복을 입고 새댁의 방에 몰래 숨어들었던 바로 그 사내였다. 그는 방을 보고 슬며시 구미가 당겼다. 5천 냥이라는 돈은 몇 년 동안 호의호식하며 살 수 있는 큰 돈이었다.
그는 별 망설임 없이 큰 보자기에 상복을 싸들고 관가로 갔다.
원님 앞에 머리를 조아리고 서서 옆에 들고 있던 상복을 펼쳐 보였다. 갑자기 벼락같은 호령이 머리 위로 떨어졌다.
“네 이놈, 네가 바로 범인이로구나!”
그는 머리를 번쩍 들어 위를 쳐다보았다. 원님이 형형한 눈빛으로 그를 무섭게 쏘아보고 있었다.
“어서 실토하거라. 사실대로 말하지 않으면 여기서 살아나가지 못할 것이니라.”
사내는 부들부들 떨며 지난 겨울에 있었던 일을 다 털어 놓았다. 그의 실토로 새댁은 누명을 벗었지만 끝내 남편의 용서는 받지 못하고 평생을 아이와 함께 떠돌게 되었다.
한 점 의혹 없이 시비를 가리고
고려 말기 이제현의 손자로 인망이 높았던 이보림(李寶林)이 성주 수령으로 있을 때의 일이다.
고을에 사는 어떤 사람의 말이 남의 밀을 다 뜯어 먹어 말 주인이 가을에 변상하기로 하였다. 그런데 밀에서 다시 싹이 돋아나자 말 주인의 태도가 바뀌었다.
“이렇게 다시 싹이 자라니, 수확할 수가 있소. 그러니 내가 변상할 이유가 없소.”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거요?”
“아니, 이치가 그렇지 않소.”
“좋소. 두고 봅시다.”
밀밭 주인은 분을 참지 못하고 관가로 달려가서 고소하였다. 이보림은 곰곰이 생각한 끝에 말 주인은 앉히고 밀밭 주인은 서 있게 한 다음 명령했다.
“두 사람이 동시에 달리되 뒤지는 자에게는 벌을 주겠다.”
그러자 말 주인이 불평하였다.
“저 사람은 서서 뛰고, 저는 앉아서 뛰는데 어떻게 따라갈 수 있겠습니까?”
“밀도 역시 마찬가지다. 다시 싹이 나서 자라기는 했지만 수확이 전처럼 제대로 되겠느냐. 그러니 너는 처음 약속대로 변상하도록 하라.”
말 주인은 더 이상 아무 말도 못하고, 수령의 지시대로 밀밭 주인에게 변상할 수밖에 없었다.
이보림의 판결은 엄정했다. 교묘하게 변상을 피하려 했던 말 주인을 꼼짝 못하게 하고, 밀밭 주인이 당할 뻔한 재산상의 피해를 면하게 하였다. 이것이 바로 법 집행의 정도가 아니겠는가. 한 점 의혹 없이 시비를 가리고, 공정한 판결을 내릴 때 진실이 바로 서고 패역과 광기의 역사로부터 삶의 바른 가치를 지켜나갈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