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과오를 시인한 형조참판
문근(文瑾)은 중종 때의 문신으로 형조참판의 관직에 있었다. 어느 날 그는 죄인들의 자백이란 것이 얼마나 신빙성 있는 것인가를 시험해 보기로 하였다. 우선 그는 집안의 하인들을 모두 불러모아 지시하였다.
“앞으로 이 닭장 안에 있는 달걀을 훔쳐가는 자가 있으면 용서하지 않겠다. 단단히 명심하도록 하여라.”
며칠 후 문근은 자신이 닭장에 들어가 달걀 두 개를 몰래 가지고 나왔다. 그리고 평소 손버릇이 나쁜 하인을 지목하여 호통을 쳤다.
“어서 바른대로 말하거라. 네 놈의 소행이 틀림없지?”
“아, 아닙니다요. 소인은 대감님이 분부하신 후로는 닭장 근처에 가보지도 않았습니다.”
“네, 이놈! 계속 거짓말을 할 테냐?”
“정말입니다요. 저는 훔쳐가지 않았습니다.”
“네 놈이 맞아야 정신을 차리겠구나. 여봐라. 이놈을 당장 끌어다가 바른 말을 할 때까지 매우 쳐라.”
잔뜩 겁에 질린 하인은 곤장 몇 대를 맞고는 사색이 되어 거짓실토를 하였다.
“대, 대감님, 제가 달걀을 훔쳤습니다.”
“정말 네가 가져갔느냐?”
“예, 대감님.”
문근은 허위 자백을 확인한 후 하인을 방으로 옮겨 푹 쉬게 하고, 좋은 음식을 갖다 주도록 하였다. 그는 방으로 들어와서 혼자 탄식하였다.
‘내가 여지껏 이걸 몰랐구나. 지난 10년 동안 내가 다스린 죄인 중에 고문을 견디지 못하고 허위로 자백한 죄인이 얼마나 많았을꼬? 아, 내 죄가 너무 크구나!’
이 일화에서 보듯 형조참판 문근은 매우 인간적이다. 그는 자신의 과오를 시인하고 탄식할 줄 아는 열린 마음의 소유자였다.
목숨을 내건 명 판결
요즘도 뚜렷한 물증이 없는 상태에서 몇 가지 혐의만을 가지고 억지로 ‘만들어지는 범법자’가 있을 수 있다. 법은 약자에게 강하고 강자에게는 약하다는 말이 있다. 또한 법이 공정성을 잃고 잘못 적용되는 사례도 있다. 그러나 임금의 외압에도 굴하지 않고 소신껏 판결을 내린 권엄의 일화는 유명하다.
순조(純祖) 때의 일이다. 어의(御醫) 강명길(康命吉)은 임금의 총애를 믿고 그 행동이 매우 방자하였다. 그는 서울 서쪽 교외에 산을 사서 그곳에 부모를 장사지냈다. 산 밑에 민가가 수십 호 있었는데, 추수 후에 집을 비운다는 조건으로 그 민가를 모두 사들였다. 그러나 그 해에 큰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약속한 대로 집을 비우고 떠나갈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강명길은 그의 하인을 시켜서 한성판윤(漢城判尹)에게 소송을 제기했다. 당시 한성판윤은 권엄이었는데, 그는 백성들을 강제로 몰아내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하루는 임금이 승지(承旨) 이익운(李益運)을 불러서 권엄에게 지시하여 민가를 철거시키게 하라는 은밀한 명령을 내렸다. 다음날 강명길이 다시 소송을 제기하였다. 그러나 권엄은 여전히 똑같은 판결을 내렸다. 이 날 임금은 진노하여 승지 이익운을 불러서 책망하였다. 이익운은 권엄을 찾아가서 그와 같은 사실을 알렸다. 하지만 권엄은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지금 백성들은 추위와 굶주림에 떨고 있는데 이들을 강제로 쫓아낸다면 모두 길 위에서 죽게 될 것이오. 내가 차라리 벌을 받을지언정 그런 짓을 해서 백성들이 나라를 원망케 하는 일은 할 수 없소.”
다음날 강명길은 또다시 소송을 했으나 판결은 마찬가지였다.
며칠이 지난 후 임금은 승지 이익운을 불러 말하였다.
“내가 조용히 생각해 보니 한성판윤 권엄의 처사가 참으로 옳았다. 판윤이야말로 훌륭한 인물이다.”
권엄은 이 말을 전해 듣고 감격하여 울었다고 한다.
이 일화는 공정한 판결의 좋은 예라고 할 수 있다. 임금의 한 마디가 곧 법이었던 시대에 목숨을 내건 권엄의 명결(明決)은 오늘날 큰 감동을 준다. 어떠한 외압에도 굴하지 않은 그의 소신과 꼿꼿한 자세는 많은 이들에게 귀감(龜鑑)이 될 것이다.
사건에 대한 유연한 대처
신응시(辛應時)가 호남 어사로 전라도 남원에 이르렀을 때 한 사건을 다루게 되었다. 불교를 독실하게 믿는 어떤 부자가 전답과 모든 재산을 만복사(萬福寺)에 시주하였다. 그런데 그 후에 가세가 기울어 굶어죽게 되었고, 자식은 유리걸식하는 신세가 되었다.
그러자 부자의 아들은 남원 부사에게 절에 시주한 재산을 돌려받게 해달라고 호소하였다.
신응시는 소장을 받아보고 다음과 같이 판결하였다.
“전지를 시주한 것은 복을 받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 아비는 이미 굶주려 죽고, 아들 또한 구걸하여 다니니 부처의 영험이 없음을 알 수 있다. 전지는 주인에게 돌려주고 복은 부처에게 바쳐라.”
신응시의 판결로 부자의 아들은 재산을 돌려받아 잘 살게 되었고, 후세의 사람들은 이것을 통쾌한 판결이라고 칭송하였다.
불교를 좌교(左敎)로 규탄하던 당시의 법 조문에 의하면 부자가 바친 전지는 나라에서 몰수하게 되어 있다. 그러나 신응시는 법 조문을 적용하지 않고, 딱한 사정을 고려하여 주인에게 재산을 돌려주게 한 것이다. 신응시의 사건에 대한 유연한 대처는 고루한 인습의 노예가 되지 않고, 모든 사물을 열린 마음으로 바라본 결과이다.
어떤 경우에든 법은 인간을 위해서 존재해야 한다. 인간의 바른 삶을 위해서 만들어진 법이 인간을 고통스럽게 하는 올가미가 되어서는 안 된다. 법의 존재 가치는 인간의 삶에 올바로 기여하는데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