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살이와 핏줄, 때로는 기구하고 때로는 절절한
<마이파더>
세계 10위권의 경제력을 지닌 한국은 해마다 수천 명의 아이들을 외국으로 입양시킨다. 40년 넘게‘고아 수출국’1위 자리를 지켰으니 무슨 변명이 필요하랴. 4위로 물러난 지금도 연간 해외 입양규모는 아프리카 후진국들보다 두세 배나 많다.“ 아기는 수출품이 아니다.”는 어느 한국계 입양인의 절규가 잊히질 않는다. 국내 혼혈인 가정을 보는 시선도 변해야 한다. 한국 사회가 외국인 100만 시대로 접어들었는데도‘피부색 쇄국주의’는 녹을 줄을 모른다. <마이 파더>는 가족애를 일깨우는 한편 단일민족을 내세워 순혈주의를 고집하는 사람들에게 성찰과 반성의 기회를 준다.
다섯 살 때 미국으로 입양된 제임스 파커(다니엘 헤니)는 자상한 양부모 밑에서 구김살 없이 자랐지만, 친부모를 찾고 싶은 마음만은 떨쳐버리지 못한다. 주한 미군에 자원입대한 파커는 같은 부대원 신요셉(김인권)의 도움으로 자신의 한국 이름이 공은철이란 사실을 알았고 텔레비전에 나가 부모의 행방을 수소문한다. 그리고 마침내 친아버지 황남철(김영철)을 만나지만 놀랍게도 그는 살인죄로 감옥에 갇힌 사형수였다. 칸막이를 사이에 둔 아버지와 아들은 조금씩 친애의 정을 나누는데, 황남철이 들려주는 이야기와 감춰진 진실 사이에서 파커는 혼란스럽다.
2003년에 방영된 <나의 아버지>라는 제목의 프로그램을 기억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한국계 입양인 애런 베이츠의 사연은 그 어떤 소설이나 영화보다 기구하고 절절했으니까. <마이 파더>는 시청자들의 한숨과 눈물을 자아낸 그 다큐멘터리를 각색한 것이다. 이야기 자체가 워낙 극적이기 때문에 스크린에서는 죄수들끼리의 대립과 코믹한 삽화를 몇 개 덧붙였을 뿐 큰 줄기는 그대로 가져왔다. 황동혁 감독은 신인답지 않은 절제력으로 아버지와 아들의 심경만 담담하게 그려낸다. 입양아 문제도 동정이나 연민보다는 정체성을 건드린다. 예컨대, 어린 파커가 머리에 노란 페인트를 뒤집어쓰는 식이다.
혈육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아버지와 아들이 22년 만에 이상한 곳에서 이상하게 만나는 장면이 관객의 명치끝을 아리게 한다. 반가움과 어색함, 원망과 죄책감, 안도와 불안으로 화면은 팽팽해진다. 그 뒤로 드라마는‘콧등은 시큰, 눈물은 울컥’이라는 예정된 코스를 따라간다. 입양아와 주한 미군, 사형제도 등 민감한 소재를 과장하거나 논쟁거리로 올리지 않는다. 그래서 상업영화의 요소를 갖춘 논픽션 드라마로 비치기도 한다. 달짝지근한 로맨스의 주인공에 머물렀던 다니엘 헤니가 질그릇을 빚듯 야무지게 연기 한다. 마지막 자막이 올라가면서 소개되는 에런 베이츠의 실제 모습을 보는 관객마다 깊은 상념에 잠길 것이다. 역시 실화는 힘이 세다.
위대하구나, 고통을 환희로 이끈 생애여
<카핑 베토벤>
“예술가란 자신에 대한 믿음을 가진 사람이지.”“난 인간의 영혼을 연결할 다리를 만들어.”“신께선 어떤 사람 귀에는 속삭이시지만 내겐 고함을 지르신다네. 그래서 귀가 먼 거야.”“공기의 떨림은 인간의 영혼에게 얘기를 하는 신의 숨결이야. 음악은 신의 언어고.”“우리 음악가들은 신의 목소리를 들어. 신의 입술을 읽고 신의 자식들이 태어나게 하지.”<카핑 베토벤>에서 추린 대사들이다. 음악가를‘악성’이란 호칭보다 더 높고 극진하게 부를 수 있을까. 폴란드 출신 여성 감독 아그네츠카 홀란드는 악성 베토벤의 육신과 영혼을 섬세하게 카피한다.
1820년 음악의 도시 비엔나. 아름다운 음악을 탄생시킨 베토벤(에드 해리스)은 청각을 잃어가더니 성격이 날로 괴팍해진다. 악보를 연주용으로 카피하려고 채용한 안나 홀츠(다이앤 크루거)라는 음대 여학생도 괜스레 눈에 거슬린다. 그러나 그녀의 실력은 베토벤이 잘못 표기한 음을 단박에 고쳐 넣을 정도로 뛰어나다.
병약한 천재 작곡가와 미모의 성실한 카피스트는 자주 다투는 음악적 동지에서 영혼을 교감하는 관계로 나아간다.‘ 9번 교향곡’작곡을 마치자 첫 연주회를 준비하는데, 연주를 들을 수 없는 베토벤이 지휘봉을 잡겠다고 나서면서 위기가 닥친다.
이 작품에서 베토벤은 음악의 성자가 아니라 야수에 가깝다. 기존 질서나 상대의 감정 따윈 아예 무시하는 고약한 영감이다. 머릿속에서 폭포처럼 쏟아지는 선율을 세상으로 내보내면서도 베토벤 자신은 소리를 들을 수 없는 처지를 비관하고 난동까지 부린다. 하지만 따져보면 너무나 인간적인 울분이었다. 베토벤은 변절자와 위선자로 몰리는 수모도 당한다. 몽매한 이들은 한 예술가의 광기어린 집념이 후대에 얼마나 많은 감동과 평안을 안겨줄지 상상도 못했을 터이다. 감독은 베토벤 주변에 안나의 젊은 애인을 등장시켜 은근슬쩍 삼각관계의 재미를 보충한다.
도입부를 눈여겨봐야 한다. 현란한 화면에 베토벤 말년의 역작인 ‘현악4중주 대푸가’가 흐르는데, 곡을 만드는 과정은 뒤에 흥미롭게 펼쳐진다. 이 영화의 절정은 역시 9번 합창교향곡을 연주하는 장면이다. 마음의 불꽃과 분수와 무지개. 황홀한 전율이라는 표현이 가능한지 모르겠다. 에드 해리스는 배우의 관록이 무엇인가를 확실히 보여준다. 숭고한 인류애와 신의 사랑을 찬양한 이 교향곡은 피날레를 사람 목소리로 장식한다. 파격적인 실험이 성공했지만 베토벤의 위대함은 그런 형식의 파괴가 아니었다. 온갖 불행과 고뇌를 환희로 승화시킨 열정은 누구도 따라갈 수 없었다.
버나드 로즈 감독의 <불멸의 연인>에 나오는 베토벤과 비교해 감상하는 것도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