넉넉한 모성을 지닌 여성
사도세자의 며느리였던 효의왕후의 성은 김씨, 본관은 청풍(淸風)이었다. 병조판서 김시묵과 당성 부부인(唐城府夫人) 남양 홍씨(南陽洪氏)가 부모였다.
효의왕후는 1753년(영조 29) 12월 13일 해시(亥時)에 가회방(嘉會坊)의 사저에서 탄생하였다. 집안에 있던 복숭아나무와 오얏나무, 그밖에 여러 꽃나무들이 가을에 갑자기 꽃이 다시 피어, 그 가족들은 효의왕후가 탄생할 좋은 조짐으로 생각하였다. 효의왕후는 순수하고 돈후(敦厚)하여 덕스러운 모습이었다. 또한 효성과 공손함이 지극하여 법도에 어긋남이 없었다.
어릴 적에 하루는 여러 아이들과 같이 놀고 있었는데, 한 아이가 자라는 풀을 뽑고 있었다. 그러자 그녀가 그 아이를 책망하였다.
“풀이 이렇게 무럭무럭 자라고 있는데 왜 뽑아 한창 자라나는 생기(生氣)를 해치느냐?”
이처럼 생물에 대한 사랑이 어렸을 때부터 지극하였다. 나중에 이 소문을 들은 친척들이 모두 그녀를 기특하게 여겼다. 살아있는것에 대한 섬세한 애정은 생명의 소중한 가치를 깨달은 사람의 행동이다. 우주 안에 가득한 만물은 어느 하나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다. 모두 사람과 함께 더불어 살아 움직이는 아름다운 생명의 실꾸리들이다. 풀 한 포기, 어린 나무의 새싹 하나도 함부로 할 수 없는 것들이다. 그런데 효의왕후는 어릴 적부터 고결한 품성을 지니고 있었다. 같은 또래의 아이들이 하는 행동을 무심히 보아 넘기지 않고, 풀 한 포기의 가녀린 생명도 예사롭게 보지 않았다. 가녀린 생명을 공경하고 따뜻하게 감싸 안을 줄 아는 넉넉한 모성을 지닌 여성이었다.
순수하고 돈후하며 덕스러워
1761년에 영조는 정조의 배필로 효의왕후를 간택하였는데, 이때 그녀의 나이가 겨우 9세였다. 그러나 왕후의 덕성(德性)은 이미 궁중에 소문이 나 있었다. 효의왕후가 처음 간택되었을 때 영조는 매우 흡족해 하여 손수‘오세(五世) 동안 옛 가풍(家風)을 계승하였으니 이는 나라의 종통(宗統)이 될 만하다.(五世繼昔寔爲宗國)’라는 여덟 글자를 써서 하사하였고, 시아버지인 사도세자도 효의왕후를 사랑하여“과연 소문대로 훌륭하다.”고 하였다. 이때 효의왕후의 사가에는 특이한 향기가 가득하여 하루가 지나도 흩
어지지 않았는데, 사람들은 이를 기이하게 생각하였다.
효의왕후는 세 차례의 간택을 거쳐 별궁(別宮)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그러나 그때 마마를 앓아 다음해인 1762년 2월에 세손의 빈궁으로 책봉되어 가례(嘉禮)를 치렀다. 세손의 빈궁이 된 그녀는 그 해 여름 뜻하지 않은 불행을 당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시아버지 사도세자의 죽음이었다. 그녀는 몹시 애통해 하며 시아버지의 이야기만 나오면 눈물을 흘리며 말하였다.
“내가 인자하신 은혜를 가장 많이 입었는데 어찌 오래 섬기고 잠깐 섬기는 것으로 더 슬퍼하고 덜 슬퍼하겠는가?”
그 후 시어머니인 혜빈을 받들 때도 모든 일을 조심하고 성의를 다하였다. 비록 잠을 잘 때나 휴식을 취할 때라도 반드시 궁인(宮人)을 시켜 수시로 문안을 살핀 후에 마음을 놓았다. 어린 나이였지만 마음 씀씀이가 항상 이러했다.
1777년에 정조가 즉위하자 효의왕후가 중전의 자리에 올랐다.
그러나 왕비는 자식을 가질 수가 없는 불임의 몸이었다. 그러자 정조는“수빈(綏嬪)이 낳은 아들을 중전의 아들로 삼으라.”는 교지를 내렸다. 그때부터 효의왕후는 자신이 낳은 아들과 조금도 다름없이 원자를 훈육하였다. 그 후 1800년 2월에 원자를 왕세자로 책봉하였고, 세자빈을 간택하여 가례를 치르려고 하였다. 그런데 6월에 갑자기 정조가 승하하자 효의왕후가 가슴을 치며 호곡하였고 밤낮으로 옷을 벗지 않고 삼년상을 마쳤다.
효의왕후는 중전의 높은 자리에 있었지만 사가(私家)에 은택을 주는 것을 경계하여 수진궁(壽進宮)과 어의궁(於義宮) 두 궁에서 남은 음식이 있더라도 궁중의 재물은 공물(公物)이므로 사가의 어버이에게 줄 수 없다고 하였다. 그리고 인척 중에 벼슬길에 나온 자가 있더라도 특별한 혜택을 베풀지 않았다. 오히려 행동을 각별히 주의하도록 당부하여 남의 지탄을 받는 일이 없게 하였다. 그리하여 남들은 효의왕후의 사가 친척들이 왕실의 외척인 것조차 모를 정도였다.
겸허한 자세와 애틋한 정
그리고 시어머니인 혜경궁 홍씨, 즉 경의왕후를 섬기는 일도 선왕을 섬기듯이 하였다. 1815년 여름에 경의왕후가 병석에서 일어나지 못하였는데, 이때 효의왕후는 이미 60세가 넘었다. 그런데도 약시중과 반찬 맛보는 일을 다른 사람에게 시키지 않았고 잠시도 곁을 떠나지 않았다. 나이 많은 며느리가 고생하는 것을 민망하게 여긴 경의왕후가 사처(私處)에 가서 쉬라고 명하였으나 끝내 물러가지 않았다.
한편, 효의왕후는 마음이 너그러워 도량이 넓었으며 남의 허물을 말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였다. 또한 친척 중에 과실을 범한 사람이 있으면 꾸짖지 않고 묵묵히 말을 하지 않아 그가 스스로 잘못을 깨닫게 하였다. 후에 잘못을 한 친척들은“마음에 부끄럽고 송구하여 벌을 받는 것보다 더 심하다.”라는 말을 하였다.
가끔 반찬이 더러 마음에 들지 않을 때 좌우에서 담당자를 치죄할 것을 청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효의왕후는“어찌 먹고 사는 일로 사람을 치죄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여 주위의 요구를 물리쳤다. 이처럼 왕후는 살아있는 것에 대한 따듯한 애정을 가지고 살았다. 그것이 사람이든 식물이든 생명을 가진 것이라면 항상 겸허한 자세로 대하고 애틋한 정을 나타냈다. 왕후의 높은 자리에 있다는 이유로 다른 사람을 업신여기거나 핍박하는 일은 없었다. 1821년 초봄부터 몸이 불편했던 왕후는 한 달이 지나자 점차 병세가 악화되어 3월 9일에 창경궁의 자경전(慈慶殿)에서 승하하였다. 이때 왕후의 춘추 69세였다. 일생 동안 성품이 온후하고 공손하여 궁중에서 칭송이 끊이지 않았던 조선의 왕후! 그녀는 지금
경기도 화성에 위치하고 있는 건릉(健陵)에 잠들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