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이것이 없었다면, 내 인생이 전혀 다른 방향으로 바뀌지 않았을까’하는 질문을 던져 본다. 한 사람의 인생에서 소중한 사물들의 추억은 의외로 아주 많다. 유난히 정이 들고 자주 입고 싶어지는 옷이나, 맞춰 신은 듯 꼭 맞는 편안한 신발, 술술 잘 써지는 펜도 좋은 물건이지만, 때로는 사람 못지않게 그리운 물건, 그것이 없다면 무척이나 안타까울 것만 같은 물건도 있다. 어린 시절 동생들과 매일 쓰다듬고 놀았던 헝겊 인형도 그립고, 티셔츠 하나를 세 자매가 서로 입겠다며 싸워서 엄마가 똑같은 티셔츠 세 벌을 사주셨던 기억도 있다. 세뱃돈을 몇 년 동안 모아 처음으로 샀던 전축 위에 엘피판을 올려놓고 밤낮으로 들었던 기억, 친구가 선물한 비디오테이프를 수십 번도 넘게 돌려보며 울고 웃었던 기억도 내가 거쳐온 ‘사물들의 역사’ 속 한 페이지로 고이 간직되어 있다. 내 인생의 아이템은 꼭 한 가지의 물건이 아니라, 내 삶을 조금씩 가꾸고 매만지고 따뜻하게 해주었던 모든 사물들인 것 같다. 하지만 그 중에서 꼭 한 가지만 선택해야 한다면, 나는 피아노를 꼽고 싶다.
매일 쓰는 휴대폰이나 노트북 컴퓨터도 수많은 사람들의 인생을 바꾸었겠지만, 내게는 피아노가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사물이 아닐까 싶다. 내 인생에는 무려 세 대의 잊을 수 없는 피아노가 있었다. 일곱 살 때, 열일곱 살 때, 그리고 서른이 넘은 어느 날. 그 피아노가 한 대 한 대 내 마음에 새겨놓은 추억의 잔상들은 내 인생의 보이지 않는 불빛이 되어, 지금도 우울한 기분이 들 때마다 내 인생을 환히 비춰주는 등대가 되었다.
피아노가 처음 우리 집에 들어오던 날을 아직도 기억한다. 일곱 살 때였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날, 우리 집 대문이 피아노가 들어오기에는 너무 작아서, 대문을 아예 뜯어내야 했다. 그때 부모님의 마음 한 구석도 와드득 뜯겨져 나갔을 것이다. 철없는 나는 부모님께 그토록 사달라고 졸랐던 피아노가 드디어 들어오는 날이라 부모님 마음이 찢어지는 것도 몰랐다. 그 시절에는 피아노가 없는 집들이 더 많았다. 나는 친구네 집에 피아노가 있는 것을 보고 엄청난 문화적 충격을 받고는 그때부터 ‘피아노 사 달라’며 노래를 불렀다. 어머니의 회상에 따르면, 그때 피아노 가격이 아버지 월급의 세 배가 넘었다고 한다. 지금도 부모님께 서운한 일이 생길 때면, 그 때 그 시절 부모님의 마음을 떠올려 본다. 아무리 형편이 어려워도, 어린 딸의 간절한 소원을 들어주시기 위해 엄청난 무리를 감수하셨을 부모님의 마음을 떠올려보면, 웬만한 서운함은 가라앉곤 한다.
그 후 피아노는 나의 가장 친한 친구가 되었다. 친구에게 토라졌을 때나, 학교에서 선생님께 꾸중을 맞고 쓸쓸한 마음으로 집에 돌아올 때도, 피아노는 언제나 내 가장 반갑고 따스한 친구가 되어 주었다. 한동안 조율을 하지 않아 ‘미’나 ‘파’ 건반이 잘 눌러지지 않을 때도, 나는 용케 그 부분을 쏙 빼거나 한 옥타브 높여서 연주를 하곤 했다. 친지들의 결혼식장에서 나는 멘델스존의 결혼 행진곡을 연주하기도 했고, 학교의 합창단 반주를 하기도 하면서 ‘수많은 사람들 속에서’ 피아노 소리가 더욱 아름답고 영롱하게 울린다는 사실을 깨닫기도 했다. 그 피아노로 나는 세 명의 이모와 세 명의 고모들의 결혼식에서 축가를 울려주었고, 두 번의 합창대회와 셀 수 없이 많은 생일축하 노래, 그리고 크리스마스 캐롤을 연주했다. 내가 기억하는 내 첫 번째 장래희망은 피아니스트였다. 중학교 때 잠깐 예술고등학교에 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지만, 일찌감치 ‘내 재능이 그 정도까지는 안 되는 것 같다’는 냉정한 판단을 내린 뒤였기에 후회는 없었다. 그런데 고등학교 2학년 때 성적이 많이 떨어져서 고민에 빠져 있을 때, 뜻밖에도 내게 두 번째 피아노가 생겼다. 아버지는 내가 ‘힘들다’는 표현을 한 적이 없는데도, 내 마음이 어지럽고 혼란스럽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셨던 것 같다. 그런 내게 아버지는 아무 말 없이 선물을 해주셨는데, 그것이 바로 내 두 번째 피아노였다.
내 두 번째 피아노는 전자 키보드였다. 피아노 소리뿐 아니라 첼로소리, 바이올린 소리, 드럼 소리 등 80여 가지의 악기 소리를 내는, 당시로서는 매우 신기한 악기였다. 나중에 알고 보니, 부모님은 내가 집안 형편 때문에 예술고등학교에 진학하지 않은 거라고 생각하시고는 미안한 마음을 갖고 계셨다고 한다. 물론 집안 형편도 고려했지만, 예고 입시를 준비하지 않은 더 중요한 이유는 내 적성이 인문계 쪽으로 더 기울어져 있는 것 같아서였다. 하지만 부모님은 내가 예고에 갔다면 더 마음껏 꿈의 날개를 펼칠 거라고 생각하셨는지, 그 미안한 마음을 선물로 표현하신 거였다. 나는 스스로 피아노에 특별한 재능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나는 별 것 아니라고 생각했던 내 모자란 재능을, 부모님은 ‘소중하다’고 생각해주신 그 마음이 어여뻐서, 참으로 뭉클했다.
그런데 엉뚱하게도 이 두 번째 피아노는 내 인생을 전혀 다른 쪽으로 끌고 갔다. 두 번째 피아노가 이전의 아날로그 피아노와 전혀 달랐던 특장점은 바로 기다란 가방에 쏙 넣어 어디든 들고 다닐 수 있다는 점이었다. 나는 소풍 때나 각종 행사가 있을 때, 그 전자키보드를 가져가 온갖 노래의 반주를 도맡곤 했다. 친구들은 그때부터 나에게 ‘딴따라’라는 별명을 지어주었다. 재미없는 모범생으로 학창시절을 끝낼 뻔 했던 나는 그 ‘딴따라’라는 새로운 별명이 무척 마음에 들었지만, 부모님은 황당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셨다. 혼란스러운 마음을 가라앉히고 더 열심히 공부하라는 뜻으로 사주신 전자 키보드를 나는 ‘친구들과 더 잘 놀기 위한 도구’로 쓰고 있었으니, 부모님은 얼마나 후회막급이셨을까. 하지만 단기적으로는 나를 ‘딴따라’로 내몰았던 그 전자 키보드가 장기적으로는 내게 소중한 추억과 커다란 치유를선물해주었다. 지금도 내가 거쳐 온 수많은 별명들 중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은 바로 ‘딴따라’다. 그 별명은 내가 좀 더 부드럽고 환하게, 사람들과 잘 어울릴 수 있는 존재라는 희망을 심어주었기에. 내 안의 아주 밝고 환한 에너지를 끌어내준 그 ‘딴따라’라는 별명을 나는 지금도 무척 좋아한다.
내 인생의 세 번째 피아노는 서른이 넘은 뒤에, 정말이지 뜻밖의 사건을 통해 나에게 도착했다. 삼십대 초반, 나는 개인적으로 굉장히 힘든 일을 겪고 있어서 매사에 의욕이 없고 심한 우울감에 빠져 있었다. 과연 내가 계속 글을 쓰며 살아갈 수 있을까, 무사히 이 고비를 넘기고 평화로운 일상을 되찾을 수 있을까, 아무런 확신이 없던 때였다. 혹시 본격적인 우울증 치료가 필요한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었는데, 정작 몸이 아파도 병원에 갈 시간도 없이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남편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디지털 피아노 브랜드 중에서 어떤 게 제일 좋은 거야?” 나는 제일 좋은 게 따로 있는 건 아니고, 보통 가정용으로 쓰기에는 어떤 것이 좋다는 조언을 해주었다. 누가 남편에게 디지털 피아노에 대한 정보를 물어보나 싶어 갑자기 생뚱맞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날 오후, 우리 집에 떡 하니 디지털 피아노가 도착했다.
나는 마침 어두운 방구석에 앉아서 침울한 상태에 빠져 있었다. 갑자기 무슨 물건이 배송되었다고 해서 짜증이 먼저 났다. 아무 것도 하기 싫고, 아무도 만나기 싫은 나날들이었다. 그런데 문을 열고나니 배송기사님과 함께 낯익은 얼굴이 함께 등장했다. 남편이었다. 그는 이렇게 말하며 디지털 피아노를 가리켰다. “네가 요새 너무 힘들어 해서, 내가 큰맘 먹고 적금 깼어.” 머릿속이 하얘지는 기분이었다. 아, 이럴 것까지는 없는데. 미안한 마음과 고마운 마음,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는 생각이 뒤얽혀 눈물이 흘러나왔다. 그 당시 우리 형편을 생각하면, 사실 그렇게 값비싸고 덩치까지 큰 디지털 피아노를 산다는 것은 지혜롭지 못한 선택이었다. 하지만 경제적 형편과 마음의 형편은 정말 달랐다. 디지털 피아노와 함께 한 뒤, 내 우울한 아침은 화사하게 바뀌었다. 때로는 밤에도 헤드폰을 낀 채로, 겉으로는 전혀 드러나지 않게, 아주 조용하게 피아노를 연주할 수 있었으니. 경제적 형편은 어려웠지만 마음의 형편은 좋아진 것이다. 결혼 후에는 피아노를 친정에 두고 왔기에 한동안 연주를 할 수 없었는데, 남편은 한때는 내게 분신 같았던 피아노가 내 곁에 없음을 안타깝게 여겼던 것이다. 그날부터 어깨 위에 무거운 바위를 얹고 사는 것만 같았던 내 안의 깊은 우울은 매일 울리는 해맑은 피아노 소리로 인해 조금씩 가벼워졌다. 지금도 내가 글을 쓰고 있는 의자 바로 앞에는 이 정든 디지털 피아노가 덩그러니 앉아 있다. 야행성인 내가 밤에 피아노를 치고 싶어 할 것을 ‘대비’하여 남편은 디지털 피아노를 선택했다고 한다.
지금도 세상의 모든 악기를 보면 가장 먼저 떠올리는 단어는 바로 ‘치유’다. 내가 음악으로 인해 받은 따스한 온기와 위로는 세상 무엇을 주어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경험이었으니. 사물들은 저마다 자기만의 언어로 인간에게 은밀한 말을 건다. 오래된 의자는 ‘이제 그만 편안히 앉아서 쉬어보라’고 권유하는 듯 하고, 보송보송한 이불이 덮인 침대는 ‘하루의 피로를 잠으로 풀어보라’고 유혹하는 것 같다. 창문은 바깥을 향한 호기심을 자극하며 ‘나를 꼭 한 번 열어봐’라고 속삭이는 듯하고, 멋진 신발은 ‘집에만 있지 말고, 얼른 세상 밖으로 나가 꿈을 펼쳐 봐!’라고 부추기는 것 같다. 삶을 바꾸는 사물들은 단지 ‘상품’으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살아있는 존재처럼 의인화되어 우리 곁의 또 다른 친구로 살아 숨 쉰다. 사물들을 가지는 데 필요한 것은 돈일지 몰라도, 사물들을 가꾸고, 사물들 속에 숨은 소중한 언어를 끌어내는 것은 ‘인간의 마음’이다. 울리고 매만지고 켜지 않으면 어떤 위대한 악기도 고물이 되어버리고 말듯이, 우리에게 소중한 사물들은 우리의 따뜻한 손길과 다정한 말걸기를 기다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