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제1의 명연설가
평안도에서 서울로 올라가 신식 교육을 받은 안창호가 1897년 고종 탄신일에 독립협회 관서지부 주최로 열린 평양 쾌재정의 만민공동회에서 단상에 앉은 고관들을 하나씩 지목하며 실정을 규탄하고 시정책을 제시하니, 청중은 그의 정연한 논리와 용기 있는 연설에 감동했다. 소문은 전국으로 퍼져나갔고 도산은 국운이 기울어가던 조선 제 1의 명연설가로 이름을 날리게 된다.
‘(도산은) 우리가 이 4천 년 역사의 조국을 잃지 않고 지키려면 썩어빠진 옛날의 모든 나쁜 버릇을 버리고 새 힘을 기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 그리고 그 힘을 기르려면 오로지 새로운 교육을 어서 바삐 하여 국민이 이체(異體)가 되어 새 사람이 되는 것밖에 없다는 것을 부르짖었다. 가슴 속에서 솟아나와 뜨거운 눈물로써 하는 그 말이 듣는 사람들의 마음을 그냥 두지 않았다. 거기에 커다란 무엇이 조수처럼, 휩쓰는 폭풍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청중은 하나가 되었다.’ 독립운동가 여운형과 이승훈이 감동받았던 도산의 삼선평 연설을 민중운동가 함석헌은 위와 같이 기술하였다.
일러스트 하고고
이토 히로부미가 ‘안창호 내각’을 제안
도산은 조선 최초의 남녀공학으로 점진학교를 세웠고, 당대의 민족지사들과 비밀결사 시민단체인 신민회를 설립했다. 이후 3·1운동 소식에 미국 교포들이 모아준 6천 달러를 갖고 상해로 가서 각지에 흩어져 있던 독립운동가들을 모아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의 산파역할을 했다. 『독립신문』을 창간했고, ‘애국가’를 작사했다. 흥사단 설립 등 조선 독립운동사에서 도산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다. 그런 도산의 위대함을 조선통감 이토 히로부미는 일찍이 알아보고 간악한 술책을 썼다.
이토가 안창호의 명성과 능력을 듣고 직접 만나 ‘안창호 내각’을 제안했으나 도산은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그대(이토)의 조국인 일본을 잘살게 만든 것이 그대였던 것처럼, 한국은 한국인으로 하여금 혁신케 하라는 것입니다. 만일 메이지 유신을 일본인 아닌 미국인이 와서 시켰다고 한다면 그대는 가만히 보고만 있었을까요?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오? 그래가지고 오늘날의 유신이 되었겠습니까?” 29세의 안창호가66세의 노회한 정객 이토의 입을 다물게 만든 대화의 한부분이다. 훗날 일제의 법정에서도 “나의 직업은 독립운동이다”라고 당당하게 진술하는 도산에게 이토의 얄팍한 간계가 통할 리 없었다. 이토는 도산과 동석했던 독립운동가 이갑에게 “안창호는 바른 사람이자 크게 될 사람”이라고 말했다.일본 식민지배와 독립운동을 알리는 데 큰 영향을 준 미국의 저널리스트 님 웨일스(Nym Wales)도 <아리랑>을 통해 안창호 선생에 대한 기록을 남겼다. ‘이동휘가 군사 지도자가 되었던 반면, 안창호는 정치 지도자가 되었다. 그는 설득력 있고 영향력 있는 대중연설가였지만 일상생활에서는 조용한 성격이었고, 말이 별로 없었다. 그렇지만 일단 행동노선을 결정하면 결연히 의견을 개진했으며, 대개는 자기의 주장을 관철시켰다.’ 뜻이 분명하고 거짓을 극도로 경계했던 도산이지만, 일상에서는 <올드 블랙 조>, <켄터키 옛집>, <주인은 찬 땅 속에>같은 흑인 영가를 즐겨 부르는 낭만적인 남자였다. 도산의 낭만성은 아내와 가족에게 보낸 편지에 진솔하게 드러난다.
독립투사의 달콤한 편지
‘나의 사랑 혜련. 우리가 서로 작별한 지가 달이 지나고 지나서 이제는 해가 지났소이다. 나는 바쁜 것만 생각하여 도무지 편지하지 아니함으로 큰 빚을 진 듯이 괴로웠소이다. 그런데 해가 지나고 보니 더욱 미안하여 큰 죄를 진 듯이 고통이 되옵니다. 나를 충성으로 사랑하고 나를 깊이 생각하는당신의 뜻을 위로는 못하고 도리어 괴롭기만 함을 생각하니 스스로 무정함을 책망하나이다. 당신은 너그러이 생각하여 용서하소서. 지금에 몸은 어떠하며 아이들은 어떠하옵나이까? 지난겨울에 과히 춥지 아니했나이까? 내가 비록 편지는 하지 아니했으나 날로 당신을 생각하고 아이들 보고 싶은 마음을 그치지 아니합니다. 로스앤젤레스의 모든 것이 다 눈에 어리나이다. 식구들의 사진이라도 보내어주시오. 당신은 평생에 나를 멀리 보내 정신상 고생을 받았을는지? 바쁜 가운데 되는대로 써서 보내오니 편지를 자주 주고 사진을 보내어주소서.’
도산은 1902년 9월 3일 이혜련 여사와 결혼하여 1938년 3월 10일 서거하기까지 약 36년 가운데 부부가 함께 생활한 기간은 10여 년에 불과하다. 함께 살더라도 가정보다 동포와 조국이 먼저였다. 남편은 매일같이 동포가 사는 곳을 찾아다니는 것이 일이었고 외로운 부인은 ‘우는 새댁’으로 알려졌다. 독립지사 아내의 생활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말해주는 대목이었다. 후일 부인은 미국에서의 신혼생활을 이렇게 회고했다. “그분은 첫째가 조국, 둘째가 담배, 그리고 아내와 자식은 열두 번째였어요.” 독립운동가의 아내는 아내이자, 자식들의 어미이자, 독립투쟁의 동지이자, 버팀목이었다. 1907년 도산이 조선으로 돌아가려 할 때 “당신은 애국자요,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일할 수 있는 대로 활동하시오.”라며 흔쾌히 승낙했지만, 한 집안의 실질적 가장이자 아비없이 홀로 아이들을 키워야 하는 여사의 대가는 참으로 가혹했다. ‘사랑, 이것이 인생에서 밟아나갈 최고의 진리요, 인생의 모든 행복은 인류간의 화평(和平)에서 나오고 화평은 사랑에서 나오기 때문이오. 우리가 실제로 경험해본 바, 어떤 가정이나그 가족들이 서로 사랑하면 화평하고, 화목한 가정은 행복한 가정이오. 그와 같이 사랑이 있는 사회는 화평의 행복을 누리오. 그런즉 우리들이 어떤 곳에, 어떤 경우에 있든지 우리의 마음이 완전한 화평에 이르도록 사랑을 믿고 행합시다. 내가 ‘사랑’ 두 글자를 보내오니 당신은 당신의 사랑하는 남편이 옥중에서 보내는 선물로 받으시오.’
항상 존칭을 사용하고 여러 일들에 이해를 구하는 자상한 남편도 떨어져 사는 아내에게 혹시 불미스런 일이 생길까 조바심을 내는 점이 인간적이다. “또 다시는 오엔(Owen)씨에 집이나 혹 다른 집에든지 이웃 다니지 말고 사나이들을 가까이 교섭지 마시오.”
‘언제나 킵 스마일’의 모던 파더
‘공부 중에 심리를 화평하게 하는 공부가 가장 큰 공부이다. 왜? 가장 큰 행복이기 때문에. 괴로운 환경에 처한 자가 심리 화평을 더욱 공부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언제든지 킵 스마일.’ 1920년대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걸고 투쟁하던 안창호는 외국의 아들에게 보낸 엽서의 마지막을 ‘항상 미소 지으라(keep smile)’라는 말로 끝맺는다. 아비가 아들에게 삶의 지혜를 말하며 다소 딱딱한 훈계처럼 이어지던 내용이 이 말 한마디로 다정함을 전한다. 감성적인 말 하나 없이 온기를 전하는, 명연설가이자 명문장가이다.
‘내 딸 수라. 너는 잘 있느냐 나는 평안하다. 내가 너를 늘 보고 싶다. 내달에 집에 가겠다. 5월 23일 네 아부지.’
연설이 당위와 설득으로 무장되었다면, 편지는 그리움을 토로하고 미안함을 전한다. 미안하여 아들에게 하나라도 더 도움이 될 만한 말을 적고, 그리운 딸에게 곧 집에 가겠다는 약속을 건넨다. 그것이 요즘으로 치면 혼자 떨어져 생계를 경작하는 ‘기러기 아빠’와 다르지 않다. 그도 사람이었고, 부인과 딸을 보고 싶어 하는 평범한 남자였다. 평범한 사람이 그토록 위대한 일을 해내기 위해서 치렀을 희생을, 세속을 사는 우리는 가늠하기 힘들다.
‘나는 남편의 직분, 아비의 직분을 다하지 못하여 아내와 자식을 고생시키는 것을 생각하면 마음이 심히 괴롭습니다.’ 호랑이는 고양이를 새끼로 두지 않는다. “조국의 뿌리를 잊지 말고 자랑스런 미국인으로 살아라.” 동양계 여성 최초로 미해군에서 장교로 복무했고, 국가안보국에서 비밀정보 분석요원으로 활동했던, 도산의 맏딸 안수산 여사가 남긴 말이다. 타임지는 안수산을 ‘이름없는 여성 영웅’에 선정하여 업적을 기렸다. 여사는 2015년 6월 24일 101세로 영면하여 아버지 곁으로 갔다.
참고서적 <독립신문>, <투사와 신사 안창호 평전>(김삼웅 저, 현암사) *편지는 발췌 삽입<안창호>(이기형 저, 두손미디어)
오늘의 편지 이야기
너, 노을에게
2017 대한민국 편지쓰기 공모전
청소년부/자연 <금상> 정예원
열일곱의 나는, 고등학교에 입학한 뒤 첫 시험을 하루 앞두고 두려움과 긴장에 휩싸여 너를 보았어. 너는 세상 그 무엇보다 장엄하고 붉었지만 새벽의 태양처럼 강렬하지는 않았어. 꼭 엄마의 육아일기에 적혀있던 ‘그날’처럼 저물어가는 것의 고귀함을 간직하고 있는 듯 했지.
내가 세 살 무렵이던 그날… 우리 가족은 아빠의 직장 때문에 청주에 살았어.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낯선 곳에서 말수가 적은 엄마와 나는 서로 손을 꼭 붙잡고 집 근처 숲길을 돌아 상당산성에 오르곤 했대. 나는 뒤집기도 늦었고, 걸음도 늦게 뗀 늦게 자라는 아이였어. 아마 다른 아이들보다 훨씬 더 힘들게 산성에 올랐을 거야.그래서일까? 마침내 정상에 올라 우리가 걸어온 길 너머 까마득히 먼 들판과 작은 집들 위로 붉게 타오르는 너를 보았을 때, 나는 너를 향해 마치 시인처럼 말문이 터졌대.
“불, 불, 불이 타는 것 같아…!” 그날의 너는 내가 기억하는 어린 시절의 가장 찬란하고 아름다운 세상이란다.
나는 이제 어른이 되기 위한 길목에 있어. 몇 년 전 사업에 실패하시고 재취업을 하신 아빠는 가끔씩 “참 살기 힘들다.”라는 말씀을 하셔. 학원에 전혀 다니지 않고 혼자 열심히 공부해서 원하는 학교에 들어간 나도 상위 1%의 부유함과 재능을 가진 친구들 속에서 힘들긴 마찬가지야.하지만 오늘… 나는 새벽 4시에 일어나 공부를 하다 아침이 밝았을 때 제일 먼저 학교에 갔다가 다시 기숙사로 돌아오며 농구 골대 위로 넘실대는 너와 마주쳤어. 삶이 힘들고 지칠 때 위로를 주는 것은 꼭 사람 뿐만은 아닌 것 같아. 너는 무모한 경쟁과 성공을 염두에 두지 않은 채 오직 현재의 너를 불태우며 너의 존재 자체로 나에게 큰 응원과 희망을 주었어.
그날, 엄마가 해주셨던 말씀처럼 저무는 것이 아니라 새로 떠오르기 위해 잠시 쉬어가는 너를 보며 나 역시 사춘기의 오늘이 언젠가 소중한 추억이 될 거라고 믿어. 너, 노을… 그래서 나는 너에게 오늘 이 마음의 편지를 띄운다. 고마워, 사랑해. 저물어가던 나의 하루를 되살려준 너를 오래오래 기억할게. 너와 함께 했던 내 어린 날과 너, 노을처럼 항상 나와 함께하는 엄마와 아빠를….
모쪼록 모든 사람의 마음에 네가 있길, 나도 너와 같은 사람이 될 수 있길 꿈꾸며….
- 정예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