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여행이란
어느 순간 나는 갈 길이 정해져 있지 않을수록 여행이 행복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미리 빽빽한 스케줄이 짜여 있을수록, 달콤한 우연의 힘이 개입할 여지가 적었던 것이다. 처음에는 숙소와 세부 스케줄까지 완벽하게 정해져 있어야만 여행을 떠났지만, 이제 나는 가는 비행기와 오는 비행기만 예약하고 나머지는 마음의 빈칸으로 비워둔다. 더 머무르고 싶은 곳에서는 여유 있게 눌러앉고, 기차를 타고 가다가 ‘저곳이 아름답다’ 싶으면 주저 없이 내릴 수 있는 그런 자유로운 여행을 꿈꾼다. 언젠가는 오는 비행기와 가는 비행기도 예약하지 않고, 언제 돌아올지 기약할 수 없는 여행을 떠나기를 꿈꿔 보기도 한다.
여행이란 낯선 사람들 사이에서 사는 것이다. 그들 특유의 악취와 고약한 향수를 맡으면서, 그들의 음식을 먹으면서, 그들의 인생에 대해 듣고 그들의 의견을 참아내면서, 때로는 말도 통하지 않으면서, 불확실한 목적지를 향해 늘 이동하면서, 계속 바뀌는 여행 일정을 짜면서, 혼자 자면서, 갈 곳을 즉흥적으로 정하는 것이다.
- 《여행자의 책》, 폴 서루, 책읽는 수요일(2016) 중에서
여행은 도저히 예측불가능한 사람과 사랑에 빠지는 일과 비슷하다. 모범적이고 순응적인 사람이 아니라, 결코 다음 행보를 예측할 수 없는 힘 센 럭비공 같은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 그것은 때로 고생스럽고 마음 아픈 일이기도 하지만, 일상의 모든 규칙을 나도 모르게 깨야 한다는 점에서 눈부신 희열이 함께하는 경험이기도 하다. 내 기억 속에 오래 남은 여행은 하나같이 어처구니없고, 계산 불가능한 모험으로 가득했다. 나는 톨레도, 베니스, 프라하에서 길을 잃었고, 비엔나, 뉴욕, 베를린에서 원래의 여행계획을 완전히 바꾸어 다른 곳으로 떠나기도 했다. 그런데 평소에는 단조롭고 반복적인 일상에 만족하던 내가 여행하는 순간에는 그 예측 불가능의 파격을 즐긴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것이 없으면 절대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던 모든 물건들이 여행지에서는 무용지물이 될 때가 많았다. 이제는 옷도 최소한으로 챙겨 가고, 종이책도 전자책으로 대신하고, 커다란 DSLR카메라가 무거워서 아주 작고 낡은 ‘똑딱이’ 카메라나 휴대폰으로 만족하기도 한다. 빈틈없이 완벽한 준비보다는 언제나 기동성 있는 상태, 유연하게 어디든 갈 수 있는 가벼운 짐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오랜 경험을 통해 깨우쳤기 때문이다.
여행을 통해 알게 된 것
인간이 자기 자신을 위로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내가 나에게 힘을 주고, 내가 나를 끊임없이 격려한다는 것은 엄청난 마음의 에너지를 필요로 하는 일이다. 여행은 그런 인간의 한계를 극복하게 해준다. 여행을 떠나는 과정에서 만나는 수많은 낯선 사람들은 서로에게 알게 모르게 영향을 주고, 힌트와 아이디어를 준다. 나도 모르게 위로를 주는 사람도 있었고, 내가 잃어버리고 놓고 나오는 소지품을 친절하게 챙겨주는 사람들도 있었다. 여행이 진정한 위력을 발휘할 때는 여행이 끝나고 오랜 시간이 지난 뒤다. ‘내 인생이 어디서부터 삐걱거리기 시작했을까, 요새 왜 이렇게 힘들고 지쳐 있을까’하는 생각으로 괴로울 때, 문득 여행지에서 가져온 작은 기념품들과 사진이 말을 걸기 시작한다.
무심하게 붙인 냉장고 자석이 옛 여행지의 추억을 불러일으켜 ‘그땐 이렇게 행복했잖아, 지금은 왜 그렇게 힘들어하니’ 하고 말을 걸어주기도 하고, 휴대폰 속의 추억이 담긴 여행 사진 속에서 너무도 환하게 웃는 과거의 내 얼굴이 지금의 찡그린 내 얼굴을 향해 위로의 말을 건네기도 한다. ‘그렇게 우울해하지 마, 결국엔 이 힘든 시간도 지나갈 거야. 아무 계획도 미련도 후회도 없이 행복했던 그때를 떠올려봐.’ 내일을 걱정하지 않고, 머나먼 미래도 걱정하지 않고, 그저 ‘오늘 밤에는 어디 묵을까’만 생각하면 되었던 방랑자의 시선으로 인생을 바라보면, 삶은 더없이 단순하고 소박해진다. 어쩌면 상황 자체가 힘든 것보다는 ‘너무 많은 것’을 바라고, 욕심내고, 기대하는 나 자신이 문제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외부 상황은 바꿀 수 없고, 나 자신의 마음 자세는 바꿀 수 있으니, 이제 그만 고집부리고 나 자신이 바뀌어 보자고 스스로 용기를 내어보는 것이다.
‘그렇게 우울해하지 마, 결국엔 이 힘든 시간도 지나갈 거야. 아무 계획도 미련도 후회도 없이 행복했던 그때를 떠올려봐.’ 내일을 걱정하지 않고, 머나먼 미래도 걱정하지 않고, 그저 ‘오늘 밤에는 어디 묵을까’만 생각하면 되었던 방랑자의 시선으로 인생을 바라보면, 삶은 더없이 단순하고 소박해진다.
여행을 떠나는 이유
여행하는 동안 나는 ‘삼무(三無)’를 즐기려고 노력한다. 첫째, 텔레비전을 보지 않기. 둘째, 노동하지 않기. 셋째, 그 누구의 눈치도 안 보기. 이렇게 해야 정말 ‘몸’만 아니라 ‘마음’도 일상을 떠날 수 있다. 텔레비전이나 인터넷, SNS를 통해 미디어와 끊임없이 연결되어 있으면, 몸은 멀리 있어도 마음은 집에 있는 것과 비슷한 효과를 내기 때문이다. 여행 가서도 끊임없이 일 생각을 하면, 마찬가지 현상이 일어난다. 일에 파묻혀 여행지의 아름다움과 다양한 정취를 즐기지 못하게 된다.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는 것이 가장 중요하고도 어려운 과제다. 나도 모르게 몸에 배어 있는 ‘타인을 향한 눈치 보기’ 습관이 여행지에 가서도 계속되기 쉽다. 아무리 편안한 사이라도 함께 여행을 떠난 동행의 눈치를 보게 마련이다. 그래서 정말로 편안하게, 저절로 눈치 보지 않는 여행을 떠나려면 혼자 떠나는 것이 가장 좋다. 혼자 떠날 수 있다면, 가까운 국내 여행이라도 아주 낯선 경험을 많이 할 수 있다.
‘뭐 먹을까’ 하고 끊임없이 상의를 하지 않고 아무 때나 아무거나 자유로이 먹을 수 있고, ‘어디로 갈까, 여기는 괜찮니’ 묻지 않고 내 마음에서 솟아오르는 충동에 따라 움직여도 누구도 나를 타박하지 않기 때문이다. 거꾸로, 혼자 떠난다는 것은 누구의 배려도 받지 못함을 뜻하기도 한다. 외로움을 감당할 수 있어야 하고, 내 몸 하나 건사하기 위해 필요한 모든 것들을 동반자의 도움 없이 혼자서 챙겨야 한다. 하지만 온전히 자기 자신을 책임진다는 것은 멋진 일이다. 나는 혼자 여행을 떠날 때 처음에는 긴장하지만, 점차 ‘온전히 나 자신이 되는 느낌’에 빠져들곤 한다. 인간관계의 중력에 이끌려 이리저리 휩쓸리다가 잃어버린 나 자신의 모습을 되찾는 느낌이 든다. 타인을 지나치게 배려하다가 자칫 나 자신을 배려하지 못하는 어리석음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나는 혼자 여행할 때 조금씩 강해지는 것을 느낀다. 평소에는 꺼내보기 힘들었던, 나 자신의 숨겨진 강인함을 발견하고 흠칫 놀라기도 한다. 나는 혼자서도 잘 지내고, 어떤 사회적 지위가 없이도 잘 지내며, 여러 가지 편의시설이나 생활용품이 없이도 씩씩하게 잘 버텨내는 나 자신을 바라보며 온갖 익숙한 속박에서 자유로워진다. 그리하여 여행을 떠난다는 것은, 온갖 인간관계와 의무사항의 네트워크 속에 복잡하게 숨겨져 있었던 ‘날것의 나’, ‘꾸밈없는 나’를 되찾는 내면의 모험이 된다. 여행은 그렇게 우리 자신을 위한 눈부신 선물이 된다. 온전히 나 자신이 되는 마음의 여정, 누구의 눈치도 볼 필요 없는 진정한 나 자신이 되는 길이라는 선물.
작가소개 정여울 작가
소통하는 인간의 심리를 다루는 글을 쓰고 강의를 한다. 저서로는 《내가 사랑한 유럽 Top10》, 《공부할 권리》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