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을 향해 ‘이름’ 붙이기
어떤 희미한 현상에 선명하게 ‘이름’을 부여함으로써 그것을 더욱 강하고 지속적인 사회현상으로 고착시키는 역할도 한다. 예컨대 김치녀, 된장녀 같은 여성 혐오표현은 여성의 실제 현실을 묘사하는 것을 넘어서서 여성들 자체를 비하하기 위해 과도하게 공격적으로 사용되는 경향이 있다. 신인류의 풍속도를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부정적인 감정을 표출하는 데 이용되는 신조어들 중에 대표적인 것이 바로 맘충, 진지충, 설명충 같은 단어들이다. 이것들은 새로운 문화현상을 설명하기보다는 특정인에 대한 자신의 개인적인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 악용되는 단어들이다.
게다가 인간을 벌레로 격하시키는 ‘충(蟲)’이라는 단어로 조합되는 대부분의 신조어들은 사실상 그 단어를 말하는 사람의 인격을 드러낸다. 상대방의 틀린 맞춤법이나 발음을 고쳐주면 ‘진지충’이라 비난한다든지, 아이를 데리고 카페를 찾는 엄마들을 ‘맘충’이라 비하하는 것은, 이해관계가 부딪힐 때나 자신과 취향이나 습관이 맞지 않을 때 상대방을 괴롭히는 수단으로 쓰이고 있다. 신인류의 풍속도를 요약하기 위한 언어가 아니라 타인을 향한 증오나 혐오를 표현하기 위해 쓰이는 말들이 유행어가 되어버린 현대사회에서 우리는 ‘나와 다른 타인’을 존중하는 방법, 인간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를 잃어가고 있는 것이다.
공공선을 위협하는 혐오표현
조남주의 소설 《82년생 김지영》(민음사, 2016)에는 평범하게 아이를 키우며 살아가는 젊은 엄마가 그저 공원에서 커피 한 잔 마셨다는 이유로 ‘맘충’이라 비난받는 상황이 그려진다. “옆 벤치의 남자 하나가 김지영 씨를 흘끔 보더니 일행에게 뭔가 말했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간간이 그들의 대화가 들려왔다. 나도 남편이 벌어다 주는 돈으로 커피나 마시면서 돌아다니고 싶다. 맘충 팔자가 상팔자야.” 그녀는 자신을 ‘맘충’이라 비하하는 낯선 남자의 시선에 놀라 뜨거운 커피를 제대로 마시지도 못하고 손등에 쏟으면서 급히 공원을 빠져나온다. 그야말로 ‘독박 육아’에 시달리던 젊은 엄마가 오랜만에 커피 한 잔 사 마시러 유모차를 끌고 나섰다가 하루아침에 ‘맘충’으로 낙인찍혀 버린 것이다.
타인의 삶에 대한 제대로 된 이해나 배려 없이 그저 손쉽게 타인의 삶을 무턱대고 비난하는 마음. 그것 이야말로 ‘이름 붙이기의 폭력’이 될 수 있다.
정치학자 제레미 월드론은 《혐오표현, 자유는 어떻게 해악이 되는가》(이후, 2017)에서 이렇게 타인에게 불쾌감을 주는 ‘혐오표현(hate speech)’이 인종차별적인 낙서, 포스터와 소책자 등 어디서나 나타나고 있음을 지적한다. 혐오표현이 문제적인 이유는 그것이 공공선(public good)을 명백히 위협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유와 평등, 민주주의와 인권을 위해 오랫동안 쌓아 올린 인류의 역사 자체가 이런 공격적인 혐오표현으로 인해 송두리째 흔들릴 수 있는 것이다. 지하철 노약자석에 앉은 할아버지를 ‘틀딱충(틀니를 딱딱거린다는 뜻)’이라고 비하하고, 삼촌에게 장난감을 사달라며 조르는 꼬마를 ‘조카몬(조카+몬스터의 합성어)’이라고 부르는 것은 너무도 기상천외한 혐오표현 아닌가. 욕설과 비속어는 모두가 ‘나쁘다’는 것을 알지만, 이런 식의 신조어는 ‘재미있다, 새롭다’는 이유로 무분별하게 사용되는 경우가 많아 더욱 문제다. 제레미 월드론은 이런 혐오표현이 아주 천천히 몸에 퍼지는 독처럼 우리 사회에 유해하다고 지적한다.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면서 더욱 강한 공격성을 띠게 되고, 혐오표현들이 비속어 등과 서로 뭉치면서 더욱 강한 독성을 지니게 되어, 공공선을 중시하는 선량한 사람들조차도 이런 혐오표현의 맹독에 상처를 입는 일이 비일비재해진다.
진심어린 존중과 배려의 가치
혐오는 또 다른 혐오를 낳는다. ‘맘충’이라는 용어에 담긴 여성 혐오에 대항하여, ‘애비충(아이를 버릇없이 키우는 아빠들을 가리키는 말)’이라는 단어가 생기기도 하고, “전라도 사람이라는 이유만으로 친구들에게 ‘홍어’라고 놀림을 받았다”며 상처받는 사람들도 생긴다. 처음에는 장난처럼 시작한 가벼운 표현들이 이제는 SNS와 인터넷을 통해 엄청난 속도로 퍼져나가면서 커다란 사회적 파장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이런 혐오표현은 어떤 변명으로도 정당화할 수 없는, 타인을 향한 명백한 인권 유린이다. ‘표현의 자유’는 이럴 때 쓰는 것이 아니다. 부정적인 감정이 생길지라도 그것을 ‘공격적인 언어’로 표현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다. 누구에게나 마음속에서는 이런저런 감정이 생길 수는 있지만, 그 감정을 ‘언어’로 표현할 때는 그것이 얼마나 큰 파장을 끼칠 수 있는지 항상 신중해야 한다. 타인을 향한 막말은 결국 자신을 향한 부메랑이 되어 또 다른 스트레스와 트라우마로 남게 될 것이다.
타인을 갖가지 증오 표현으로 공격하고 비판하는 것은 쉽지만, 누군가를 항상 마음 깊이 존중하고 배려하는 것은 훨씬 어렵고 섬세한 일이다. 그것은 지성과 감수성을 필요로 하는 일이다. 무엇보다도 순수하고 투명한 마음을 필요로 하는 일이다. 진심 어린 존중과 배려에는 돈이 들지 않지만 그 가치는 어마어마하다. 타인에게 진심으로 존중받고 있다는 느낌은 자존감을 높이고, 삶에 대한 행복감을 높이며, ‘함께 살아가는 세상’에 대한 믿음과 공공선에 대한 확신을 가져다준다. 당신에게 친절하게 설명해주는 사람을 ‘설명충’이라고 비난하기 전에 한 번만 생각해보자. 그 사람은 잘난 척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사실을 제대로 알려주기 위해 당신에게 자신의 소중한 시간을 아낌없이 내어주고 있는 것임을. 더운 여름날 힘들게 유모차를 끌고 가는 아기엄마를 ‘맘충’이라 비난하기 전에 한 번만 생각해보자. 당신의 어린 시절, 당신을 키우기 위해 밤낮으로 애쓰던 어머니의 정성과 노고를. 한 번만 되돌아보고, 한 번만 더 곱씹어 보면, 이 세상에 ‘충’이라고 불릴 사람은 한 명도 없다. 나와 생각이 다르더라도, 설령 그 사람이 큰 잘못을 저질렀다 하더라도, 누군가를 ‘충’으로 비하하는 순간, 자신의 지성과 인격을 스스로 갉아먹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아름다운 연결고리의 시작타인을 존중하여 이름 부르기
이제는 ‘요새 어떤 신조어가 유행하는가’가 아니라, ‘누가 이런 이름을 굳이 붙여서 부르는가’를 주목해야 할 때다. 누가, 왜, 어떤 의도로 신인류의 명칭을 급조하여 그것을 통해 타인의 삶을 조롱하는지, 누가 어떤 상황에서 혐오표현을 급조하여 상대방에 대한 낙인 찍기를 시도하는지를 정확히 포착해낼 수 있을 때, 우리는 그 이름 붙이기가 얼마나 현대인의 감성을 황폐화시키는지를 제대로 느낄 수 있지 않을까. 이름은 부르기만 좋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듣기도 좋아야 한다. 부르는 사람의 편의대로 마구 만드는 이름이 아니라 듣는 사람이 기분 좋을 수 있는 이름만이 상호간의 진정한 대화와 소통을 가능하게 만들 수 있다. 김춘수 시인의 시 <꽃>처럼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던 존재가,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는 것. 그것은 정성스러운 호명, 존중 어린 이름 부르기 속에서만 가능한 관계의 기적이다. 우리가 서로에게 아름다운 이름이나 호칭을 불러줄 때만, 우리는 서로에게 아름다운 꽃이 될 수 있으니까. 타인의 이름이나 호칭을 부른다는 것, 그것은 그 사람과 나 사이의 아름다운 연결고리를 만드는 것이 되어야 하니까.
작가소개 정여울 작가
소통하는 인간의 심리를 다루는 글을 쓰고 강의를 한다. 저서로는 《내가 사랑한 유럽 Top10》, 《공부할 권리》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