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은 고을’ 청주의 자랑거리
경부고속도로 청주 나들목을 따라 도심으로 들어섰다. 계절상 봄날의 한가운데 서 있지만 아직 나무들은 잎이 자라지 않아 앙상하다. 곧게 뻗은 왕복 4차선 도로 가장자리에 플라타너스가 줄을 맞춰 서 있다. 차창 밖으로 흐르듯 스치는 나무들의 행렬이 끊이질 않는데 그나마 아직 잎이 크게 자라지 않아 그렇지 한 달만 더 지나도 잎이 무성해져서 하늘을 가리겠다. 이곳은 청주를 처음 방문한 사람이라면 절대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드라이브 구간이다. 비상등을 켜고 천천히 달리는 차들은 대부분 외지에서 온 차들이 아닐까 싶다. 초여름부터 초가을까지는 초록 물결이 너울거리고 가을에는 바싹 마른 잎들이 사각사각 소리를 내며 차바퀴에 깔려 사라질 것 같다. 겨울 역시 비범한 모습은 아닐 터. 앙상한 나뭇가지에 새하얀 솜이불이 포근하게 감싸 안으면 설국으로 입성한 듯 황홀한 기분이 들지 않을까.
1990년대 귀가 시계로 불렸던 드라마<모래시계>의 한 장면도 이곳에서 촬영되었다. 온통 초록으로 뒤덮인 길을 주인공이 오토바이를 타고 유유히 달리던 모습이 떠올라 속도를 늦추고 창문을 열었다. 손을 뻗어 바람과 인사를 나누듯 봄바람에 악수를 청했다. 그러는 동안 저절로 드라마 주제곡이 흥얼거려졌다. ‘우우우우우~~~ 우우우우~~’ 가로수를 가까이에서 보기 위해 갓길에 차를 잠시 정차하고 횡단보도 중앙에 섰다. 아스팔트 도로에 이런 길이 있다는 자체가 감동이다. 중앙분리대와 갓길 분리대까지 모두 플라타너스가 심겨 있는데, 청주 나들목에서 가경동 죽천교까지 약 5km 구간에 1,500여 그루가 심겨 있다고 한다. 푸른 나무들이 줄지어 서 있는 이곳은 청주의 상징이자 자랑임이 분명하다. ‘맑은 고을’ 청주가 괜한 소리가 아니다.
봄의 서정을 즐기기에 좋은 곳
“목적지에 도착했습니다.” 앙칼진 내비게이션의 안내가 봄날의 정적을 깬다. 목적지는 상당산성 남문이다. 너른 잔디광장에 유치원 아이들이 병아리처럼 쫑알거리며 뛰어 놀고 있다. 몇백 년, 아니 수천 년 동안 한 자리를 지켜온 산성이 아이들의 놀이터가 될 줄이야. 성을 축성한 사람들은 절대 상상할 수 없었던 일일 게다.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피비린내 나는 살육의 현장을 평안한 쉼터로 바꿔 놓았다. 이제 막 파릇하게 올라온 잔디와 짙푸른 소나무, 신부의 드레스처럼 화사한 벚꽃이 어우러져서 봄날의 깊은 서정으로 빠져든다. 상당산성 성벽 길은 4km 남짓 되는 거리다. 오르락내리락하는 급경사가 적어서 아이들도 쉽게 걸을 수 있는 산보길 수준이다. 다른 계절에 비해 봄은 아쉬울 만큼 짧다. 봄을 즐기려는 사람들이 많은 이유도 이 때문이다. 꽃보다 예쁜 미소를 지으며 사진을 찍는 사람들, 따뜻한 볕 아래에 앉아 독서 삼매경에 빠진 할아버지, 간식을 먹으며 웃음꽃을 피우는 아주머니들… 상당산성에는 봄이 토실토실 무르익어간다. 남문으로 향하는 길을 따라 올라가니 잔디마당이 한 눈에 들어온다. 그 반대편에는 수문장이 지키고 있을 것 같은 남문이 위엄을 자랑한다.
걷는 맛이 있는 상당산성 성곽 길
상당산성은 보은의 삼년산성과 함께 충청북도를 대표하는 산성으로 꼽힌다. 상당산성이란 이름은 백제의 상당현에서 유래되었다. 상당산의 계곡과 분지를 감싸듯 둘러쌓은 상당히 큰 포곡식 석축산성이지만 성을 언제 쌓았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다. 지금의 산성은 임진왜란 중인 선조 29년(1596)에 수리한 이후 숙종 42년(1716)에 이르러 석성으로 다시 쌓았다. 남문은 산당산성의 정문 격이다. 일반적인 성의 경우 성문 바깥쪽에 옹성이나 적대를 두어 성문을 보호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상당산성은 예외다. 대신 남문 아래쪽에서 올려다보면 남문까지 경사가 심한 것을 볼 수 있다. 즉, 적군을 한 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지형적 특성을 그대로 살렸기 때문에 굳이 옹성이나 적대가 필요하지 않았으리라. 대신 성벽의 바깥으로 덧붙여서 쌓은 치성을 두어 적이 접근하는 것을 좀 더 일찍 관측하고 싸울 수 있도록 했다. 남문을 지나 서문으로 향하는 왼쪽 길은 경사가 가파르다. 숨이 턱밑에까지 차오를 때쯤 깊은 한숨을 토해낸다. 그때 눈앞에 펼쳐지는 풍광이라니. 공기 맛도 풍경도 다르다. 이후부터는 평탄한 길이다. 드디어 서문에 도착. 현판에 미호문(弭虎門)이라 쓰였다. 활로 맹수의 왕 호랑이를 쏘는 문이니 적군인들 쉽게 이곳을 범하지는 못했겠다. 이어지는 길 역시 구불구불 뱀이 기어가듯 이어진다. 동문으로 가는 길은 아직 복원이 덜 되어 마치 무너진 옛 성곽을 걷는 기분이다. 동문에는 진동문(鎭東門) 현판이 걸려 있는데 외적을 진압하려는 의지가 문 이름에서 전해진다. 성문을 내려서자 쉼터에 발을 디딘 듯 평안함이 밀려온다. 잔잔한 호수 주변으로 이제 막 잎이 돋기 시작한 여린 순들이 가득하고 벚꽃과 개나리가 성곽을 완주한 도보꾼을 반겨주는 듯하다. 옴팍한 성안에는 먹거리가 풍성하다. 도시락이나 간식을 준비하지 않아도 되는 이유가 이것 때문이다. 성곽을 한 바퀴 돌아보고 나서 늦은 점심을 먹기에 그만이다.
발길이 멈추듯 시간도 멈춰
청주를 대표하는 달동네를 찾았다. 역시나 길은 좁고 가파른 골목길이 이어진다. 흔히 ‘수암골’이라 불리는 이곳은 청주시 상당구에 자리한다. 354m의 나지막한 우암산이 바람막이를 하고 있어 주말이면 가벼운 트레킹을 즐기려는 사람들로 분주해진다. 한국전쟁 이후 피난민들이 모여 살면서 지금과 같은 마을이 형성되었다. 그러나 급속한 산업화 바람에 밀려난 사람들이 합류하기 시작하면서 수암골은 하늘 아래 달동네로 전락해 버렸다. 그렇게 도심의 어두운 그림자가 되어 오랜 시간을 생명 없는 회벽 색의 시멘트로 치장한 채 무심한 시간을 보낸 수암골. 2007년 청주의 예술단체들이 ‘추억의 골목여행’이라는 주제로 다양한 벽화를 그리기 시작하면서 마을이 거듭나게 되었다. 칙칙하고 암울해 보였던 마을에 익살스럽고 해학적인 표정의 벽화가 그려지고 정감 어린 그림들이 마을 사람들에게 웃음 바이러스를 감염시켰다. 이후 소지섭, 신현준이 주연한 드라마 <카인과 아벨>, 국민 드라마로 선풍적인 인기몰이를 한 <제빵왕 김탁구>가 이곳에서 촬영된 이후 수암골은 더는 잊힌 달동네가 아니다. 예쁜 카페들이 하나둘씩 문을 열더니 주말은 물론이고 평일에도 카메라를 든 사람들이 골목골목을 누비고 다닌다. 특히 젊은 연인들이 주류를 이룬다.
수암골에서 챙겨봐야 할 곳
수암골 벽화는 타지의 것에 비해 익살스럽고 재기발랄한 것이 특징이다. 강아지 그림에는 진짜 목줄이 매달려 있어 기발함까지 더한다. 토속적인 민화, 화사한 꽃밭을 옮겨놓은 멋들어진 유화, 지난 시절을 추억케 하는 새마을운동 로고, 귀여운 강아지와 고양이, 입체적으로 그려진 언덕길 올라가는 아이, 타일로 만든 벽화 등 종류만 40여 가지가 넘는다. 일몰을 감상하기에 좋은 수암골 전망대도 찾았다. 이곳에 서면 청주 시내가 한 눈에 들어온다. 번화한 상업시설은 넓은 평지에, 서민들의 터전인 수암골은 비탈진 우암산 자락에 자리를 잡고 서로 다른 곳에 뿌리를 내린 나무들처럼 살아간다. 고층아파트의 화려한 조명과 달리 수암골의 가로등 불빛은 초라하고 외롭게 보인다. 점점 사라져 가는 골목길, 낯선 이에게는 미로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만, 그 속에는 돈으로 살 수 없는 추억이 그려져 있어 마음을 편하게 한다. 봄의 한가운데 서서 청주를 찾아봐야 할 이유가 이것이다.
Information
● 찾아가는 길
상당산성
* 자가용_상당산성 남문 주차장 이용 (청주시 상당구 성내로124번길 14)
* 대중교통_상당산성 남문 방향 버스 이용
수암골 벽화마을
* 자가용_수암골 벽화마을 주차장 이용 (청주시 상당구 수동 80-15번지)
* 대중교통_우암초등학교 방향 버스 이용
● 별미
상당집(043-252-3291)은 청주사람들에게 소문난 맛집이다. 워낙 손님이 많아 합석은 기본. 100% 콩으로 만든 두부와 비지장, 청국장이 인기다. 셀프로 제공되는 손두부는 몇 번을 먹어도 눈치 주는 일이 없다. 막걸리 안주로는 묵과 파전이 좋다. 상당산성을 돌아보고 들리기 좋으며 식사 후에는 저수지 주변을 산책해도 좋다. 드라마<영광의 재인>촬영장으로 알려진 영광이네(043-224-2332)는 국수와 짬뽕이 맛있다. 짬뽕은 매콤한 편이며 해물이 한가득 올라와 보고만 있어도 흐뭇해진다. 김탁구 보리빵과 단팥빵, 야채 고로케 등도 간식으로 권할 만하다.
● 문의
청주시청 문화관광과 043-201-2042~4 / www.cheongju.go.kr/tou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