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다시 보기
학창시절 수학여행 때문에 한 번쯤은 다녀간 곳이 경주다. 그래서 낯설기보다 친근하다. 나이가 들어서 다시 찾은 경주는 옛 추억들이 퍼즐 조각처럼 맞춰지는 느낌이다. 어떤 이에게는 아련한 추억으로, 또 어떤 이에게는 먹물처럼 번지는 여린 사랑의 기억으로 말이다.
경주는 도시 전체가 거대한 박물관이다. 때문에 모두 돌아보려면 일주일도 부족하다. 좀 더 효과적으로 여행하려면 지역별로 동선을 짜는 게 중요하다. 대표적인 지역으로는 왕릉이 모여 있는 대릉원 지구, 옛 신라의 궁궐터가 있던 월성지구, 불교미술의 보고로 알려진 남산지구로 나뉜다. 낮은 햇볕을 피하기 좋은 대릉원에서 시간을 보내고 밤에 월성지구를 찾으면 좋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에는 남산지구의 솔숲에서 몸도 마음도 건강해지는 피톤치드에 몸을 맡겨보자. 시간이 허락한다면 화랑의 기상을 느낄 수 있는 신라밀레니엄파크도 찾아보면 좋겠다.
경주는 과거와 현재가 공존한다. 천 년을 하루처럼 살아가는 경주사람들. 그들 곁에는 언제나 과거에 머물러 있는 과거완료형인 왕릉이 있다. 부드러운 왕릉의 곡선을 따라 걷다 보면 현재진행형인 경주 사람들의 삶을 만나게 된다. 과거와 현재를 통해 그들은 시간을 공유하며 같은 곳에 터를 잡고 살아간다.
가장 먼저 찾은 곳은 대릉원이다. 대릉원은 경주 고분군들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크다. 입구에 들어서자 소나무가 하늘을 덮을 정도로 무성하다. 여느 소나무숲 길에 비교해도 뒤지지 않을 만큼 쉼과 여유가 있어 보인다. 한낮 더위에 숨이 죽은 듯 축 늘어진 나뭇가지들이 조금씩 기운을 차리고 있다. 산책길에는 소나무가 호위무사처럼 발걸음을 지켜준다. 몇 발짝을 걸었을까. 소나무가 숲 가장자리로 옮겨가더니 활엽수가 교대근무를 나섰다. 나지막한 기와 담장 뒤에 홀로 잠든 능이 있다. 신라 제13대 왕인 미추왕의 능이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미추왕은 재위 23년 만에 대릉에 장사지냈다’ 하였다. 그래서 이곳을 ‘대릉원’이라 부른다. 왕릉 주변에 유독 대나무가 많다. 미추왕릉임이 밝혀지지 않았을 때는 이곳을 ‘죽릉’ 또는 ‘죽장릉’이라 불렀다. 이어 발굴 당시 금관과 천마도 등 수많은 유물이 나왔던 천마총이 기다린다. 발길을 돌려 경주 고분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큰 황남대총에 닿았다. 높이만 25m에 이르는 거대한 능이다.
달빛이 있어 더 좋아라
경주의 밤
어느덧 정수리에 있던 태양이 어깨너머까지 내려앉았다. 대릉원 밖 첨성대로 가는 길목. 봄날 유채꽃의 뒤를 이어 연꽃과 해바라기가 곱게 피었다. 한낮에 몸을 숨겼던 사람들도 해가 어스름해지자 하나둘씩 거리로 쏟아진다. 월성지구는 햇볕을 피할 곳이 없으니 당연하다.
경주의 밤은 어떨까? ‘신라의 달밤’이라는 식상한 수식어가 있지만 달밤에 갇힌 나만의 경주를 만나고 싶었다. 뉘엿뉘엿 저물어가는 해를 등지고 첨성대 앞에 섰다. 스타는 대중들에게 익숙해야 하고 또한 친숙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첨성대는 스타가 갖춰야 할 조건을 모두 갖추지 않았는가. 초등학생들도 첨성대 사진은 한 번쯤 봤을 것이다. 그래서 익숙하고 친근하다. 첨성대가 카메라 세례를 가장 많이 받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또한 스타 모델의 조건 중에서 절대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외모다. 사각형과 원형이 적절히 조화를 이룬 첨성대는 신라 건축의 정수임이 분명하다.
내친김에 반월성까지 돌아본다. 반월성은 일반 석성과 달리 토성이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성터임을 알 수 없다. <삼국사기>의 기록에 의하면 ‘파사왕 22년에 금성 동남쪽에 성을 쌓아 월성이라 불렀다’고 전한다. 성을 중심으로 궁전들이 자리 잡았음을 짐작할 수 있겠으나 지금 남은 것은 조선 시대에 축조된 석빙고만 남아 있다. 가파른 비탈을 내려서서 인도를 따라 돌아오면 동궁과 월지에 닿는다. 천 년을 이어온 왕실의 권위는 밤에도 불을 꺼트리지 않는 법이다. 동궁과 월지는 야경 투어의 핵심 스폿이다. 학창시절 동궁과 월지를 안압지로 배웠다. 안압지(雁鴨池)는 신라 멸망 이후 시인 묵객들이 폐허가 된 연못을 보며 ‘화려했던 궁궐은 간데없고 기러기와 오리만 날아든다’며 시를 읊음으로써 기러기 ‘안(雁)’ 자와 오리 ‘압(鴨)’ 자를 써서 ‘안압지’라 불렀다. 그러던 것이 1980년 월지 표시 토기 파편이 발견되면서 2011년부터 동궁과 월지로 부르게 되었다. 쇠락과 폐허의 상징이었던 곳이 부흥의 역사를 맞은 셈이다. 동궁과 월지에는 조명이 더해져서 로맨틱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밤에 느낄 수 있는 정취로는 최고 수준이다. 어스름한 달빛 아래 사랑을 속삭이는 연인들, 깔깔대며 추억을 남기는 청춘들. 경주의 밤은 조금씩 깊어간다.
솔숲에서 느끼는 한가로움
경주에 가면 꼭 한 번씩 들렀다 오는 곳이 있다. 삼릉이 그곳이다. 아달라왕, 신덕왕, 경명왕의 것으로 알려진 능이 나란히 있어 삼릉이라 부른다. 등산을 즐긴다면 경주 시내가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남산 등산도 괜찮겠지만 굳이 땀을 흘릴 필요 없이 삼릉 소나무 숲에서 산보를 즐기다 와도 좋다. 삼릉 소나무 숲에는 곧게 뻗은 잘생긴 소나무보다 이리저리 못생긴 나무들이 대부분이다. 배병우 사진작가의 소나무 작품이 알려지면서 봄에는 사진애호가들이 많이 찾는다. 특히 옅은 안개가 자욱하게 끼고 소나무에 아침 햇살이 비추기 시작하면 몽환적이면서도 아주 신비로운 사진을 얻을 수 있다. 사실 요즘은 삼릉 소나무를 촬영하는 제철이 아니다. 그래도 어쩌랴. 철이 지났다고 가보지 않고 후회하느니 가보고 실망하는 편이 백배 낫지 않겠는가. 삼릉에서 솔숲을 따라 개울 돌다리를 건너면 경애 왕릉이 있다. 신라 55대 왕인 그는 927년 포석정에서 제사를 지낸 후 잔치를 베풀고 있을 때 후백제 견훤의 습격을 받아 생을 마감했다. 숲에서는 가벼운 손부채질만으로도 더위를 잊을 수 있다.
아이들이 만족할 수 있는 곳
신라 밀레니엄파크
신라밀레니엄파크는 ‘신라’를 테마로 꾸며진 테마파크다. 한때 드라마 <선덕여왕>의 세트장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많은 사람이 그렇고 그런 세트장에 실망해서 뭐 볼 게 있겠냐 하겠지만 여기는 상상 이상이다. 지상 무대와 수상 무대에서는 스펙타클한 액션과 특수효과가 관객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주간에는 <천궤의 비밀>, 야간에는 <여왕의 눈물>을 공연한다. 청해진을 무대로 펼쳐지는 장보고 공연장도 볼만한 공연이 많다. 특히 신라 화랑들이 펼치는 스릴 넘치는 기마 무예는 절대 잊지 말 것. 사전에 공연시간을 염두에 두고 동선을 짜야 알차게 관람할 수 있으니 참고하자. 자녀와 함께라면 문화체험마을 공방에서 다양한 체험에도 도전해보자. 골품제도에 따라 격차를 느낄 수 있는 신라 시대 가옥들을 돌아보는 것도 괜찮다. 당일 관람권을 구입하면 파크 내의 모든 공연을 관람할 수 있다. 호텔 라궁이 함께 있어 숙박을 이용할 수도 있다. 호텔 투숙객에게는 파크 관람이 무료다. 입장권을 저렴하게 구입하려면 소셜커머스를 이용하면 좋다.▷ 문의 054-778-2000
Information
● 찾아가는 길
내비게이션 동궁과 월지(경상북도 경주시 원화로 102)
기차는 서울역에서 신경주역까지 KTX 하루 21회(05:30~22:00) 운행, 약 2시간 10분 소요된다. 버스는 서울고속버스터미널에서 하루 17회(06:10~23:55), 동서울종합터미널에서 하루 22회(07:00~24:00) 운행한다. 약 4시간 소요된다.
● 별미
경주 최부자집’으로 널리 알려진 최씨 고택 주변에는 쌈밥집이 유명하다. 한우불고기쌈밥, 돼지고기쌈밥 등 메뉴를 고를 수 있으며 맛깔스런 반찬들이 함께 나온다. 오랜 전통을 자랑하는 별채반 교동쌈밥(054-773-3322)은 지역농산물로 담아내서 더욱 건강한 밥상이다. 경주시민들이 즐겨 찾는 순두부 집들도 북군동, 보문동 일대에 많이 모여 있다. 맷돌순두부(054-745-2791)와 전통맷돌순부두(054-743-0111)가 유명하다. 경주에서 60년 넘게 장사를 해온 냉면집 1호 평양냉면(054-772-2448)은 물냉면, 비빔냉면 모두 인기가 좋다. 황남빵과 찰보리빵은 경주 대표 주전부리다. 황남빵은 1939년부터 지금까지 3대가 맛을 지키고 있고, 찰보리빵은 찰보리, 달걀, 팥을 주원료로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