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情)이 흐르는 시장 속으로
청주 육거리종합시장에 도착한 것은, 조금 이른 점심 식사를 해도 아무렇지 않을 오전 11시 30분 무렵. 제2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계단을 따라 내려가 처음 만난 가게는 방앗간이었다. 반짝반짝 윤이 나는 태양초가 수북히 쌓여 있는 모습을 보니 그것만으로 가을의 정취를 듬뿍 느낄 수 있었는데, 방앗간 안쪽에서 문득 고소한 향기가 은근히 퍼지기 시작하는 게 바깥까지 느껴졌다.
“요즘이 이제 햇깨가 나올 때니까 기름 짜달라는 손님들이 조금씩 오시기 시작했어요. 아직 일러서 묵은깨랑 햇깨가 반반 정도 되긴 하는데, 그래도 이제는 햇깨가 많아지죠.”
잘 볶아 압착시켜 짜낸 참기름을 페트병에 담던 주인아저씨는 참기름 향만큼이나 기분 좋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낯선 이가 불쑥들어와 “사진 좀 찍어도 되겠느냐?”고 물어도 “아유 그럼요. 찍고 싶은 대로 찍으세요”라며 자리를 비켜주는 모습은, 넉넉한 충청도 인심을 그대로 보여주는 장면이기도 했다.
“이제 추석 지나고 날 차가워지고 김장철 오면, 그때부터는 정신없이 바빠요. 지금이야 좀 여유가 있지만.” 이번엔 곱게 고추를 빻던 주인아저씨가 “아직 식사 전이면 저 안쪽으로 가보라”며 국밥집을 하나 알려주었다. 시장에서는 물론, 청주 안에서도 상당히 유명한 집이란다.
그렇게 도착한 국밥집은, 정말 유명한 곳답게 사람들이 많이 들어차 있었다. 이동하는 동안 찾아보니 국밥 못지않게 유명한 것은 곱창전골이지만 혼자서는 모두 먹을 수 없는 노릇이기에 눈물을 머금고 국밥을 주문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상 위에 놓인 것은 국밥 한 그릇과 공기밥 하나, 깍두기 한 그릇이 전부. 양파나 풋고추 같은 것도 없이 단출하기 이를 데 없다. 그만큼 국밥의 맛에 자신이 있다는 뜻일 것이라 생각하며 국물을 떠먹어보니 잡내 하나 없이 깔끔하다. 속에 들어 있는 순대는 당면이 아니라 돼지피와 고기로 채워 넣어 맛이 진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결코 거슬리지 않는다. 이만하면 전국 어
디에서도 뒤지지 않는 수준이다. 계산을 하고 밖으로 나서니, 얼마나 오랫동안 사용했는지 짐작도 되지 않을 만큼 세월의 더께가 쌓인 솥들이 새삼스레 눈에 들어온다. 방앗간과 국밥집, 단 두 곳만 들렀을 뿐인데도, 육거리종합시장에 대한 기대는 벌써 한없이 높아만 진다.
청주육거리종합시장 info
찾아가는 길
청주IC – 강상촌 분기점에서 오른쪽 방향 – 석곡분기점에서 594
지방도로 이용 – 모충대교 사거리에서 우회전 후 500m 직진
운영시간 06:00~20:00
문의 043-222-6696
시장 주변 관광지 상당산성, 청주고인쇄박물관, 수암골 백화마을
상인들 사이에서는 “육거리시장에서 돈을 못벌면 어디 가서도 돈을 벌지 못한다”는 말이 있었다고 한다.
그만큼 사람이 많이 몰리는 곳이었다는 뜻.
사람이 그만큼 몰렸던 가장 큰 이유는 좋은 물건이 전국적으로 많이 모였다는 뜻이기도 하다.
누구보다 빠르게 정중동(靜中動)의 표본
보통 “충청도 사람들은 여유롭다”고들 한다. 그래서 자칫 변화에도 늦게 대응한다는 오해를 하기도 쉽지만, 천만의 말씀. 적어도 청주 육거리종합시장의 사례를 보면 그 반대라는 것을 알수 있다.
육거리종합시장을 걸으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이 바로 시장의 천장 역할을 하는 아케이드. 시장 전체를 덮어주는 아케이드 덕분에 장을 보러 온 손님이나 물건을 내놓은 상인 모두 눈과 비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기에 지금은 전국적으로 보급되었는데, 이 아케이드를 전국에서 가장 먼저 도입했던 곳이 바로 육거리종합시장이다. 그뿐만 아니라 지역경제 활성화를 위한 전통시장 상품권을 가장 먼저 발행했던 곳 역시 육거리종합시장이었으며, 대형마트에서나 볼 수 있는 쇼핑 카트를 주차장마다 비치해 고객의 편의증진을 가장 먼저 도모했던 곳도 육거리종합시장이었다. 다시 말해, 지금 전국적으로 틀을 잡아가고 있는 ‘새로운 전통시장’의 롤 모델이 바로 육거리종합시장이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역사가 짧은 것도 아니다. 구한말이었던 약 120여년 전부터, 청주의 젖줄인 무심천의 제방에 서던 청주장을 모태로 하고 있으니 그 역사만 해도 백 년이 넘었고 현재의 ‘육거리종합시장’이라는 명칭을 사용한 것도 벌써 50년 가까이 되어 간다.
그러니 당연히 청주의 중심지 역할을 오랫동안 해온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전개다. 그래서 지금도 청주의 중심가인 성안길과 육거리종합시장은 대로를 따라 이어지고 있어서 다양한 연령대의 고객이 시장을 찾고 있다. 그래서 이곳은 아이를 안고 혹은 손을 잡고 있는 젊은 엄마들을 많이 볼 수 있는 시장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런 단란한 모습을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곳은, 당연히 먹거리 골목. 만두와 옛날식 빵들, 시장 통닭과 족발이 진을 치고 있다. 이 골목은 그저 걷는 것 만으로도 행복해지는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게다가 가격이 저렴해서 만용(?)에 가까운 선택을 해도 큰 부담이 느껴지지 않는 다는 게 무엇보다 반가운 점. 특히 새우 꼬리가 앙증맞아 보이는 새우만두들과 아주 오래전부터 그 자리에서 정직하게 구워냈을 빵들은 청주 사람들이 오래전부터 사랑해오고 있는 먹거리들이니 조금씩이라도 맛을 보는 게 좋다는 게 상인들의 귀띔이다.
육거리종합시장의 또 다른 특징이라면 잡화와 의류를 판매하고 있는 상점이 많다는 것. 의류는 주로 장년층을 대상으로 하는데, 그중에서도 특히 ‘몸빼’의 비중이 상당히 높았다. 전국 어느 시장을 돌아다녀도 그만큼이나 화려한 무늬를 자랑하는 ‘몸빼’는 본적이 없을 정도로 수도 많고 종류도 많았다. 의류를 취급하는 상인들에게 그 이유에 대해 물어도 그저 웃으며 “몰라유. 많이들 찾으니까 그렇겠쥬”라고만 할 뿐이니 정확한 사연이야 알 수 없는노릇. 하지만 그저 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지는 그 옷들이 시장을 화려하게 만들어주는 것만은 분명했다
다시, 사람이 모이고 정이 모이는 시장으로
상인들 사이에서는 “육거리시장에서 돈을 못 벌면 어디 가서도 돈을 벌지 못한다”는 말이 있었다고 한다. 그만큼 사람이 많이 몰리는 곳이었다는 뜻. 사람이 몰렸던 가장 큰 이유는 좋은 물건이 전국적으로 많이 모였다는 뜻이기도 하다. 실제 지금도 육거리종합시장의 과일 가게에는 경북 김천에서 수확한 포도와 충북 영동에서 수확한 포도가 같은 가게에서 팔리고 있다. 교통의 요지이자 한반도 물류의 중심에 가까이에 위치하고 있기에 누릴 수 있는 호사인 셈.
당연히 충북의 특산물들을 만나기도 용이하다. 특히 제천을 중심으로 한 산간 지방에서 재배하거나 채취한 약재들이 눈에 많이 보였는데, 황기를 정리하던 상인은 “황기라면 보통 강원도 정선에서 난 것만 생각들 하는데, 아녜요. 제천에서 난 황기가 얼마나 좋은데요. 여름 보내고 딱 지금 같은 시기에 황기 넣고 백숙 끓이면 그동안 흘린 땀 다 보충돼요”라며 자랑을 아끼지 않았다.
그뿐인가. 내륙 지방의 시장답게 민물에서 난 것들도 여기저기서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중에서 가장 먼저 눈길을 끌던것은 바로 커다란 가물치다. 청주 인근 지역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가물치는 워낙 싱싱해 보는 것만으로도 위압감을 느낄 정도였다. 그리고 청주 사람들이 ‘올갱이’라 부르는 다슬기 역시 빼놓을수 없는 민물 먹거리였는데, 주로 물 맑은 괴산에서 많이 잡힌다고 한다. 깨끗이 씻어 그대로 끓여 최소한의 간만 하면 그 자체로 훌륭한 요리를 탄생시킨다는 설명에 침이 꿀꺽 넘어간다.
이렇게 볼거리 살거리가 많은 시장임에도 불구하고, 워낙 많아진 대형마트로 인해 예전만큼의 성황을 누리지 못하고 있는 게 사실이긴 하다. 그렇다고 해서 육거리종합시장의 역할이나 위상이 축소되지는 않았다. 지금도 약 1,200여 개의 점포에서 3,000여 명의 상인이 하루 1만여 명에 이르는 손님들과 마주하고 있으니까.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거래액만 해도 연간 3,000억 원에 이르니 청주 경제의 당당한 한 축을 담당하고 있는 셈이다. 물론 여기까지 오는 데에는 상인들의 노력도 부단했다. 각자의 구역선을 철저히 지키며 가게 주위를 청결히 하는 데에 누구나 앞장을 섰고 물건을 진열하는 데에도 좀 더 보기 좋고 식별하기 좋도록 하기 위해 애를 썼다. 그래서 여느 전통시장보다 훨씬 더 밝은 분위기와 깨끗한 환경을 자랑하고 있었다. 게다가 충청도 특유의 인심도 한몫을 했다. 낯선 사람이 무엇을 물어도 웃으며 “괜찮아유”라며 답을 해주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어느새 단골이 된것 같다. 그리고 그 미소들이 다시 전국에서 사람을 끌어모을 것이라는 희망이 보인다.
- Mini Interview
대를 잇는 단골들의 시장을 만들겠습니다!
(최경호 | 상인연합회장)
“육거리종합시장에는 10개 단체가 있습니다. 그 단체들이 98년도에 다 함께 모여 머리를 맞대고 상의를 했었지요. 더 이상 시장이 쇠락해가는 것을 그저 손 놓고 볼 수만은 없다는 생각에 무엇이든 해야겠다는 절박한 심정이었습니다.”
최경호 회장은 당시를 생각하며 슬쩍 웃어 보였다. 지금이야 시설 현대화의 선두주자로 손꼽히는 육거리종합시장이지만, 당시만 해도 전통시장에 어떤 변화를 시도했던 적이 단 한 번도 없었기에 상인들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고민과 노력을 통해 갖가지 아이디어를 내놓는 한편 시청과 의회에 도움을 청했다고 한다. 그래서 완성된 것이 바로 지금의 모습. 그래서 지금까지 청주육거리시장을 벤치마킹하러 왔던 단체만 해도 1,550여 곳에 이를 정도란다.
“하지만 그것도 이제는 과거의 일입니다. 다시 또 새로운 날들을 위해 새로운 계획을 해야 할 때가 지금이거든요. 상인들끼리야 ‘이제 장사해서 돈을 버는 시대는 지난 것 아니냐’는 말도 나오고 있긴 합니다만, 그래도 시장에서는 장사가 활발하게 이뤄져야지요. 지금 오는 손님의 다음 세대, 그다음 세대들을 위해서라도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