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발자취를 따라서 경기전 & 전동성당
‘고궁(古宮)의 묵은 지붕 너머로 새파란 하늘이 씻은 듯이 시리다. 우선 무엇보다도 그것에는 나무들이 울창하게 밀밀하였으며, 대낮에도 하늘이 안 보일 만큼 가지가 우거져 있었다. 그 나무들이 뿜어내는 젖은 숲 냄새와 이름 모를 새들의 울음소리며, 지천으로 피어 있는 시계꽃의 하얀 모가지, 우리는, 그 경기전이 얼마나 넓은 곳인지를 짐작조차도 할 수 없었다.’
『혼불』의 최명희 작가는 단편소설 『만종』에서 경기전을 이렇게 묘사했다. 경기전은 태조 어진을 모시기 위해 조선 태종 10년인 1410년에 창건했다가 불에 탄 뒤 광해군 6년인 1614년에 중건한 한옥마을의 대표적인 문화재다. 가뿐한 마음으로 경기전에 들어서자 어디선가 청량한 바람이 불어든다. 8월의 무더위를 잊게 하는, 고마운 여름 바람이다.
“와, 경기전에 들어오니 마치 시간여행을 하는 기분이에요. 담장 너머엔 나들이를 나온 사람들이 가득한데, 여기는 참 한가롭네요. 마치 조선시대로 여행을 온 것 같아요.”
이번 전주한옥마을 여행을 신청한 동울산우체국 황재희씨와 산청우체국 변귀영 씨, 진해우체국 우문희 씨가 한 목소리로 외친다. 2014년 동기인 세 사람은 ‘우정사업본부’라는 아름다운 인연을 통해 특별한 우정을 나누고 있는 사이다. 실제로는 언니-동생 사이지만 마치 동갑내기 친구마냥 정겹기만 하다. 특히 황재희씨와 변귀영씨는 오늘이 태어나서 처음 전주에 발걸음을 한 날이라고. 하여, 이미 2번이나 전주를 여행했던 우문희씨가 일일 가이드가 되기로 했다.
“이쪽으로 오면 대숲이 있어요.”
우문희 씨의 안내에 따라 발걸음을 옮긴다. 작은 문을 지나자, 길 양쪽으로 높이 솟아오른 대나무숲이 보인다. 하늘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촘촘히 들어선 대나무를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시원해진다.
이번엔 전주한옥마을의 또 다른 상징, 전동성당으로 향한다. ‘천주교 순교 1번지’로 불리는 전동성당은 우리의 소중한 종교 문화유산이다. 1914년 준공된 서양식 근대 건축물로, 로마네스트 양식으로 지어진 건축물 자체의 아름다움으로 유명하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성당 중 하나로 꼽히는 만큼 전동성당 앞엔 사진을 찍는 사람들이 꽤 많다. 세 사람 역시 전동성당 앞에서 잊지 못할 추억을 담는다.
정갈한 작가의 혼에 취하는 최명희문학관
‘나는 원고를 쓸 때면, 손가락으로 바위를 뚫어 글씨를 새기는 것만 같은 생각이 든다. 그것은 얼마나 어리석고도 간절한 일이랴. 날렵한 끌이나 기능 좋은 쇠붙이를 가지지 못한 나는, 그저 온 마음을 사무치게 갈아서 손끝에 모으고, 생애를 기울여 한 마디 한 마디, 파나가는 것이다.’
대하소설 『혼불』후기에서 작가 최명희는 이렇게 썼다. 반나절 동안 가만히 물소리를 들으며 ‘소살소살’이란 의성어를 고민했다는 작가. 전주한옥마을을 발길 닿는 대로 걷다가 ‘최명희문학관’을 만났다. 어른 허리에 다다르는 1만 2천 장이 넘는 원고지와 작가의 손때 묻은 만년필을 보며 작가의 삶을 가늠할 수 있었다. 여행이 끝난 후 어떤 마음으로 일상에, 업무에, 그리고 삶에 복귀해야 하는지 잠시 생각해보게 하는 시간이다. 이 또한 여행이 주는 특별한 선물이 아닐까.
한옥마을 전경이 한눈에 펼쳐지는 오목대 다시 한옥마을을 자박자박 걷는다. 강렬한 태양 덕에 이마에 송골송골, 땀방울이 맺히지만 발걸음을 멈출 수가 없다. 주위를 둘러보니 가족, 연인, 친구와 손에 손잡고 여행을 즐기는 수많은 이들이 보인다. 한쪽에선 길거리 공연이 펼쳐지고 또 한쪽에선 시원한 차를 시음하기도 한다. 이를 마음껏 즐기는 사람들의 열기로 한옥마을 전체가 후끈후끈 달아오른다.
비록 날씨는 무덥지만 오목대에 오르기로 한다. 경기전 동남쪽에 위치한 작은 언덕으로 한옥마을에서 가장 높은 위치에 자리하고 있는 오목대. 태조 이성계가 남원 황산에서 왜구를 물리치고 돌아가던 중 승전 잔치를 벌였던 곳으로 유명하다. 그리 높지 않은 언덕이지만 경사가 가팔라 한여름에 오르기엔 다소 벅차다. 하지만 세 사람은 서로 에너지를 불어 넣으며 사이좋게 계단을 오른다. 이윽고 정상에 서자 전동성당부터 경기전을 지나 한옥마을 전경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위에서 보니 포도송이처럼 어우러진 한옥지붕이 꽤나 멋스럽다.
“전주 한옥마을은 우리의 고전적인 아름다움과 현대미가 조화를 이룬 곳이네요! 부산엔 이런 곳이 없어서 오늘 정말 특별한 여행을 한 기분입니다.”
한동안 오목대에서 한옥마을의 전경을 바라보던 세 사람이 다시 전주 한옥마을로 들어선다. 아직 구경하지 못한 곳이 많아 마음이 바쁘다. 그러나 전주는 느린 걸음으로 걸어야 제 맛이 아니던가. 고풍스러우면서도 정겨운 기품이 넘치는 한옥 사이 골목길을 걷는다. 견훤이 세운 후백제의 수도이자, 조선왕조 500년을 꽃피운 탯자리인 전주가 속삭여 주는 옛 이야기에 흠뻑 취하고픈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