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월이다. 어느새 낙엽이 진다. 바람이 불 때마다 우수수 떨어져 내린다. 가을을 좀 더 느껴보려는 분들은 충남 아산으로 가보시길. 드라이브를 즐기기에 좋은 은행나무길이 있고 아름드리 소나무로 가득한 숲길이 있다.
낭만 가득한 가을 길
아산 시내를 빠져나와 현충사 가는 길에 섰다. 염치읍 송곡리에서 현충사가 소재한 백암리까지, 곡교 천변을 따라 3km 남짓 조성된 이 길에 높이 10m를 훌쩍 넘는 아름드리 은행나무 1,000여 그루가 2열종대로 우거져 있다. 지난 1973년 현충사 성역화 당시 식재한 은행나무가 40여 년의 세월이 지나며 아름드리 터널을 이룬 것이다. 10월 중순이면 이 나무들의 가지와 가지가 맞닿아 아득한 은행나무 터널을 이룬다. 지금 길은 서서히 노란빛으로 물들어 가고 있는 중. 내주 혹은 늦어도 2~3주 후면 길은 온통 노란빛으로 물들겠다.
3km의 길이라면 차로 5분이면 지나칠 짧은 거리다. 하지만 길이 주는 행복감은 아득할 정도로 크다. 차를 몰고 길을 가다보면 은행나무 잎이 차창으로 비처럼 쏟아진다. 천국으로 가는 길이 있다면 아마도 이런 풍경이 아닐까. 차를 몰고 길을 몇 번이나 오고 가길 반복하다 아예 길옆에 차를 세우고 걷는 사람들이 많다. 곡교천 반대방향으로 두 세 곳 옆길이 있는데 여기에 차를 세우면 된다.
길이 유명세를 타자 근자에 들어 데크 길이 놓여 ‘걸을 수 있는 길’로 다시 태어났다. 천변을 따라 이어진 데크 길 곳곳에는 쉼터와 전망대가 있어 시원한 강바람 속에서 가을의 여유를 즐길 수 있다. 이 길은 2000년과 2001년에 산림청이 주최한 ‘아름다운 숲 전국대회’에서 2년 연속 우수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은행나무 길은 안개가 자욱하게 깔리는 새벽 무렵이 가장 아름답다. 우윳빛 안개 속으로 희부윰하게 보이는 노란 은행나무들이 한 폭의 파스텔화를 그려낸다. 은행나무 길은 현충사로 이어진다. 아산은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외가가 있던 곳. 충무공은 아산에서 무예를 연마했고 학문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이곳에서 혼인을 했다. 충무공 이순신 기념관은 국보 제76호로 지정된 <난중일기>와 <서간첩>, <임진장초> 등 충무공과 관련한 다양한 유물을 전시하고 있다.
현충사 역시 가을 분위기를 느끼기에 더없이 좋은 곳이다. 이순신 초상이 모셔진 본당까지 가는 길은 공원처럼 잘 가꿔져 있다. 한나절 가을 소풍을 즐기기에도 안성맞춤이다.
가을 속 고요한 절
오래된 절집 들머리엔 대개 울창하고 아름다운 숲길이 있다. 해남 대흥사가 그렇고 변산의 내소사, 오대산의 월정사가 그렇다. 숲길을 걸어 오르는 동안 세속의 때를 조금이나마 씻어내라는 뜻일 터. 봉곡사 역시 마찬가지다. 아산시 송악면 유곡리, 봉수산 자락에 자리잡은 봉곡사는 들머리에서 절 입구까지 가는 솔숲길이 좋다. 숲길은 오른쪽에 조그마한 골짜기를 거느리고 오른다. 길은 완만하다. 그다지 급하지도 않고 너무 평탄하지도 않다. 길이는 700m 남짓. 구불구불 휘어진 소나무 숲길을 걸어가는 재미가 여간 쏠쏠한 게 아니다. 아쉬운 점은 길이 아스팔트로 포장돼 있다는 것. 흙길이었다면 더 좋았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든다. 소나무 밑둥에는 ‘브이’자 모양의 흠집이 새겨져 있다. 일제가 2차 대전 당시 비행기 연료 등을 만들기 위해 나무에 상처를 내어 송진을 채취해간 흔적들이라고 한다.
숲길이 끝나는 곳에 봉곡사가 있다. 산비탈에 돌축대를 쌓고 지은 아담한 절이다. 별다른 요사채는 없다. 대웅전과 향각전, 삼신각이 전부다. 세월의 흔적을 말해주듯 대웅전 처마를 채색한 단청은 색이 바랬다. 돌계단을 걸어 절 왼쪽 언덕에 있는 삼성각에 오르면 절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온다. 뺄 것도 더할 것도 없는 절의 품새가 정갈하다. 봉곡사는 신라시대 진성여왕 때 도선국사가 창건했는데, 고려 땐 석암사로 불렸다고 한다. 조선 말기 고승 만공 스님이 도를 깨우친 절이기도 하다. 절 입구 왼쪽 언덕에 세계일화(世界一花)라는 만공 스님의 친필이 새겨진 탑이 서 있다.
심신이 평화로워지는 한 때
봉곡사에서 온양온천 방향으로 5분쯤 가다 보면 피나클랜드다. 아산만방조제 공사 때 까부숴진 석산의 초라한 몰골을 10여 년간 가꾸어 예쁜 정원으로 탈바꿈시켰다. 붉게 물든 메타세콰이어 진입로가 가을 분위기를 물씬 느끼게 한다. 아름다운 정원과 레스토랑, 연못과 잔디밭 등이 어우러져 가을 소풍을 즐기기에 좋은 곳이다. 산책로를 따라 전망대로 오르면 일본의 설치작가 신구 스스무가 만든 바람개비 모양의 설치물을 볼 수 있다. 전망대에서 좀 더 오르면 산꼭대기에 ‘진경산수’라는 정원이 펼쳐진다. 왼편으로 서해대교, 정면으로 아산만 방조제가 보인다.
저녁 무렵에는 공세리 성당으로 가보자. 국내에서 가장 아름다운 성당 가운데 하나다. 붉은 벽돌과 먹빛 벽돌의 대조가 이채롭다. 성당은 수령 300년 이상의 고목 일곱 그루에 아늑하게 둘러싸여 있다. 단풍도 곱고 눈 덮인 겨울 풍광도 예쁘다. 드라마 <모래시계>,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 등의 배경이 되기도 했던 곳이다. 가수 god도 뮤직비디오를 만들었고 안치환도 성당의 은행나무 아래서 노랫말을 썼다고 한다.충청도는 우리나라 최초로 천주교 복음이 전파되면서 한국 천주교가 시작된 지역. 성당 터는 조선시대 충청, 전라, 경상도 일대에서 거둔 조세를 쌓아두었던 공세창고가 있던 자리다. 아산에서 포교 활동을 하던 드비즈 신부는 공세창이 폐지되자 직접설계해서 그 자리에 1922년 성당을 완공했다. 붉은 벽돌과 뾰족한 지붕이 어우러지는 고딕 양식 건물이다. 마치 중세풍의 그림 같다. 꼬부랑 할머니들이 성경을 끼고 올라가는 모습을 보고야 한국임을 실감한다.
한국을 사랑한 드비즈 신부는 직접 약도 지었다. 예전에는 종기가 많이 났는데, ‘이명래 고약’이 종기에는 최고였다. 드비즈 신부가 바로 ‘이명래 고약’의 개발자다. 신부는 자신을 돕던 이명래 씨에게 고약의 비법을 전수해 주었다.
강원도 일대 성당이 박해를 피해 모여든 신자들의 신앙촌에서 출발했다면, 서해안 성당은 목숨 대신 신앙을 지킨 순교의 역사를 지니고 있다. 천주교 박해 기간에 숨진 순교자의 수는 1만여명. 공세리 성당 출신 순교자도 28명이나 된다. 삼형제가 모두 순교한 박의서·원서·익서 형제의 묘가 성당 마당에 남아 있다. 성당 옆 팽나무 가지 아래에는 성모상이 있고 성당을 감싼 숲 그늘의 오솔길 가장자리에 십자가의 길 조상(재판에서 십자가형을 받고 죽기까지의 예수 수난을 기억하고 참배하기 위해 그 과정을 14개로 나누어 조각상으로 만든 것)이 만들어져 있다. 성당 주변을 조용히 산책하다 보면 어느새 마음이 평화로워진다. 충청도 양반의 생활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외암마을도 놓치기 아까운 곳이다. 마을의 진산(珍山)인 설화산을 배경으로 월라산, 면잠산, 봉수산이 마을을 감싸고 있고 마을 앞에는 반계(磐溪)라는 개울물이 흐른다. 전형적인 배산임수(背山臨水) 지형이다. 양반들이 이런 명당 자리를 가만히 놔둘리 없는 일. 당시 충청 지역에서 제법 권세를 누리던 예암 이씨 가문이 이 곳에 자리를 잡고 집성촌을 이뤘다.
마을에 들면 성큼 다가온 가을을 온 몸으로 맞을 수 있다. 마을 입구의 드넓은 벌판은 황금빛으로 익었고 길 옆 코스모스는 가을 바람에 흔들린다. 구불구불 이어지는 돌담길이 가을의 정취를 물씬 느끼게 해준다. 이런 풍취 덕인지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 ‘취화선’, 드라마 ‘장길산’ ‘임꺽정’ ‘덕이’ 등이 이곳을 배경으로 촬영했다. 아산 여행의 마무리는 온천이다. 아산에는 온양온천, 도고온천, 아산온천 등 온천이 많다. 특히 온양온천은 우리나라 온천의 역사와 함께 할 정도로 유서 깊은 곳이다. 고려 때 이미 온수군이라 불려 온천 휴양지로 각광받아 왔는데, 조선 세종과 세조, 현종, 숙종 등 많은 왕들이 이곳에 온궁을 짓고 온천욕을 즐겼다. 파라다이스 스파 도고는 아이들이 물놀이를 즐길 수 있도록 워터파크 시설을 갖췄고, 아산 스파비스는 테마형 워터파크다. 바람에 흩날리는 은행나무잎이 가득한 길, 마음마저 느긋해지는 소나무 숲과 종소리가 낮게 퍼지는 성당이 있는 곳 그리고 몸을 따뜻하게 데워주는 온천이 있는 아산. 가을을 만끽하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곳이다.
여행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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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부고속도로 천안IC을 나가 1번 국도와 21번 국도를 번갈아 타고 아산으로 간다. 서해안고속도로 서평택IC에서 아산호를 건너 39번 국도 따라 가도 된다. 봉곡사는 아산 시내에서 39번 국도를 타고 외암리 민속마을 지나 공주 방면으로 11km쯤 가면 대술·유곡 쪽으로 갈리는 삼거리를 만난다. 616번 지방도 쪽으로 우회전해 900m쯤 가서 봉곡사 팻말을 보고 좌회전해 1km를 들어가면 주차장에 닿는다. 공세리 성당은 삽교천 방조제 못가 왼쪽으로 ‘공세리’ 이정표를 보고 마을로 들어서면 만날 수 있다. 온양온천, 아산온천, 도고온천 등 온천지역에 호텔들이 몰려 있다. 외암리 민속마을(041-544-8290)에서 팜 스테이를, 영인산 자연휴양림(041-540-2479) 통나무집에서의 숙박도 해볼 만 하다. 파라다이스 도고호텔 인근 일미식당(041-541-1132)은 청국장, 순두부, 우렁쌈밥을 잘하는 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