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용등급제 → 신용점수제’로
세상 사람 모두를 단 10가지 종류로 분류할 수 있을까? 사는 곳, 먹는 밥, 하는 일이 모두 다른 이들을 고작 10가지 틀에 가둔다면 필시 제대로 된 구분이 아닐 것이다. 이런 이유로 정부가 신용등급제를 신용점수제로 바꾸는 방안을 추진한다. 현재의 1~10등급인 개인 신용등급 기준을 1~1,000점까지 세분화한다는 내용이 담겼다. 대출심사를 조금 더 세밀하고 정확하게 하겠다는 취지다. 우리나라 신용 5등급 대출자는 782만 명(나이스신용평가정보 지난해 말 기준)이다. 이들 모두는 똑같은 신용등급으로 거의 비슷한 대출한도와 금리가 적용된다. 연봉과 연령, 직업 등 각기 다른 조건 속에 놓인 사람들인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이같은 신용등급은 내가 어떤 금융기관을 이용할 수 있는가를 가늠하는 중요한 잣대가 되고 있다. 신용 1~5등급이 국내 16개 시중 은행에서 대출받을 수 있다면, 4~6등급은 보험사와 카드사·캐피탈사, 7~8등급은 저축은행, 9등급 이하는 대부업체에서 각각 대출받을 수 있다. 어떤 금융기관은 내 신용등급만 보고 나를 소 닭 보듯 취급하는 게 현실인 것이다.
특히 지난해부터 법정 최고금리 한도가 27.9%로 낮아지면서 저축은행과 대부업체는 더 좋은 신용등급을 가진 사람으로 대상 고객군을 옮기고 있다. 7~9등급을 상대로 하던 저축은행은 6~8등급으로, 9~10등급을 대상으로 하던 대부업체는 8~9등급으로 한 단계씩 더 신용도가 좋은 고객들을 주고객으로 삼았다. 돈 떼일 염려가 많은 저신용자에게 지금처럼 낮아진 법정 최고금리로 자금을 빌려주는 것은 위험하다는 게 이들 업체의 설명이다. 결국 9~10등급 초저신용자들은 금융기관으로부터 완전히 소외된 계층으로 낙인찍혀 정부 지원 없이는 자체적인 회생조차 불가능해진 상태다.
신용도 상시 관리의 시대
정부가 신용점수제 도입을 중장기 과제로 삼은 것은 이러한 배경에서다. 그렇다면 신용점수제가 도입되면 문제가 해소될 것인가? 전망은 부정적이다. 신용점수제는 지금의 10등급을 더 잘게 쪼개어 1,000등급으로 나눈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금융기관들 입장에서는 고객들의 신용도를 좀 더 세밀하게 들여다볼 수 있어서 관리하기가 좀 더 수월할 것이다. 하지만 대출자들은 이로 인해 더 좋은 점수를 받기 위한 눈치 보기가 치열해질 것으로 보인다. 가령 기존 신용등급제에서는 신용 5등급이라면 780만 명의 같은 등급자들 사이에 묻혀 지낼 수 있었지만, 신용점수제에서는 내가 501점인지, 599점인지에 따라 희비가 엇갈리는 상황이 연출될 수밖에 없다. 바야흐로 점수 하락을 막기 위해서 신용도 관리를 꾸준히 해주지 않으면 안 되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문제는 ‘연체’다
이제 개인 신용도가 나빠지는 가장 핵심적인 이유를 따져보자. 신용도에 가장 치명적인 것은 ‘돈을 제때 못 갚는 일’이다. 현재 우리나라의 개인 신용등급은 ‘나이스신용정보’와 ‘올크레딧’ 두 곳에서 평가한다. 은행이나 저축은행과 같은 금융기관들은 이 두 기관에서 개인들의 신용정보를 받아 신용도를 판단하고 대출을 해 준다. 신용정보 회사들이 평가하는 기준을 살펴보면, 대출원금이나 이자 10만 원 이상의 금액을 5영업일 이상 연체한 경우 신용도가 내려간다. 신용카드를 써 놓고 대금을 결제일에 정확하게 내지 못하거나 휴대폰 단말기 할부금을 매월 제때 납부하지 못하는 일 등 신용 악화는 대부분 ‘연체’에서 비롯된다.
신용도가 바닥으로 떨어져 정부의 지원 없이는 회생이 거의 불가능한 ‘채무불이행자(과거 신용불량자)’들을 만나보면, 매우 오랜 기간에 걸쳐 연체 습관이 형성됐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빌린 돈을 하루 이틀 늦게 갚는 것쯤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다가 한 달 두 달이 되고, 이내 석 달이 넘어간다. 금융회사들은 통상 이렇게 연체일이 90일이 지나면 사실상 돈을 떼였다고 생각해 대부업체나 채권추심업체에 대출채권을 팔아버린다. 각종 재산압류를 비롯해 정상생활을 하기 힘들 정도로 빚 독촉에 시달리는 것은 바로 이때부터다.
그러면 연체를 한 사람은 빚만 다 갚으면 신용도가 회복될까? 정답은 ‘NO’다. 한 번 연체한 사람은 이후에도 연체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빚을 다 갚아도 신용도가 회복되는 데에는 매우 오랜 시간이 걸린다. 신용도를 잘 관리하려면 갚아야 할 빚을 제때 갚는 것이 중요하다.
예상치 못하게 시작되는 ‘연체’
신용도 악화의 주원인이 ‘연체’에서 온다는 사실은, 신용도 악화를 막는 가장 핵심적인 방법이 ‘연체’를 막는 데에서 출발한다는 점을 의미한다. 대출 규모를 최소화해 자금 사정이 어려운 긴급 상황이 와도 갚을 수 있을 만큼만 빌리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다. 특히 신용카드는 대출의 일종이지만 일반 대출에 비해 사용이 손쉽다는 이유로 가볍게 취급되는 경우가 더러 있으니 주의하여 사용하자.
연체를 하는 이유로는 바쁘거나 깜빡해서 상환 일자를 놓치는 이른바 ‘거래자의 부주의’가 대표적으로 꼽힌다. 가급적 자동이체 서비스를 이용해 상환기일을 놓치지 않도록 하고, 미리 통장잔액을 확인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만약 연체를 했다면, 연체 기간이 가장 오래된 대출부터 갚아야 한다. 연체한 기간이 길수록 신용등급에 미치는 악영향이 더 커지기 때문이다.
카드 현금서비스를 조심하라
카드를 이용한 단기 현금서비스가 있다. 급하게 현금이 필요할 때 신용카드에서 돈을 찾아 쓰는 기능이다. 때때로 이것을 현금인출과 혼동하는 경우가 있는데 현금서비스는 일종의 단기대출이며, 일정 금액 이상 쓰면 신용 평점이 하락하니 주의해야 한다.
이뿐만 아니라 카드사에 제공하는 ‘리볼빙’ 서비스도 유의해야 한다. ‘리볼빙’은 카드이용대금을 일부만 결제하고 나머지를 다음달로 이월시키는 기능이다. 언뜻 돈이 부족해 연체를 하는 사고를 예방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하기 쉽지만 ‘리볼빙’에는 많을 경우 20%대에 달하는 폭리가 부과되기 때문에 오히려 독이 될 수 있다.
낮은 금리로 대환하라
그동안 시행되어 온 신용등급제에는 한 가지 문제점이 있었다. 2금융권 대출을 이용한다는 이유만으로 신용도가 하락한다는 것이다. 대출 상환 능력이 아주 좋은 사람도 저축은행에서 대출받았다는 이유로 신용등급이 깎여 더 비싼 이자를 지불해야 했다.
하지만 올 하반기부터는 어느 금융회사에서 빌렸는지보다 얼마의 금리로 빌렸는지가 더 중요해진다. 낮은 금리로 대출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은 그만큼 신용도가 좋은 사람이라는 판단에서다. 이런 평가방식은 무척 합리적이다. 높은 이자를 지불하면서까지 돈을 빌리는 사람은 그만큼 자금 사정이 열악하다는 뜻이고, 동시에 이자 부담에 더 많이 시달리게 되므로 신용이 악화될 가능성도 더 높다. 이는 앞으로의 신용관리에 있어 낮은 금리를 찾아 대출을 갈아타는 것이 중요한 방법이 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적은 돈을 빌릴 때는 금리에 그리 연연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급전이 필요해 저축은행에서 100만 원을 빌리면 이자가 연 25%일 경우 월 2만 원, 연 15%일 경우 월 1만2천 원 수준이다 보니 가급적 빨리 빌릴 수 있는 고금리 대출도 서슴없이 이용하기도 한다. 하반기부터는 같은 저축은행 대출이라도 신용도에 미칠 수 있는 영향이 다를 수 있으니, 절차가 번거롭더라도 가급적 10%대 중금리 대출을 이용하는 것이 안전하다.
일반 시중은행에서 받는 주택담보대출도 마찬가지다. 주택담보대출을 해야 한다면 정부가 지원하는 각종 정책 대출상품들을 꼼꼼히 살펴보면 더 저렴한 금리로 갈아탈 방법이 많으므로 고민한 후 선택하자.
신용 ‘기록’을 채워라
대학을 졸업하고 갓 취업에 성공한 사회초년생은 앞날이 창창하고 이제 어엿한 직장도 생겼으니 신용등급이 높지 않을까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실제 이들의 신용등급은 5등급 정도다. 신용도를 평가할 수 있는 아무런 거래 실적이 없으므로 중간 정도의 신용등급을 부여하는 것이다. 가진 재산이 많아서 대출이나 카드 한 번 이용해본 적이 없는 40대 직장인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신용도는 반드시 거래 데이터를 기반으로 평가된다.
이쯤 되면 혼란스러울 수 있다. 대출이 많으면 신용도가 악화된다고 했는데, 대출이 없어도 신용도가 좋은 게 아니라니…. 중요한 것은 대출이 있고 없고를 떠나 얼마나 빌린 돈을 잘 갚아 왔느냐다. 가장 이상적인 케이스는 적은 돈을 자주 빌리고 오랜 기간 연체 없이 잘 상환했을 때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신용카드의 사용이 반드시 나쁘지만은 않다.주거래은행을 한 곳 정해 집중적으로 이용하는 것은 신용기록을 쌓는 데 매우 보탬이 된다. 한 금융회사에 급여이체를 등록하고 대출 등 금융거래를 집중하면 은행으로부터 더 신원 보장이 잘 된 사람으로 간주돼 금리 우대를 받을 수 있다. 또 여러 은행을 이용하는 사람에 비해 자신의 연락처 변경 등을 제때 은행에 알릴 수 있어 연체 사실을 은행으로부터 즉각 통보받는 데에도 도움이 된다. 만약 이미 여러 은행으로부터 대출을 받은 사람이라면 ‘금융소비자정보포털 파인’의 ‘금융주소 한번에’ 서비스를 이용해 자신의 개인정보 변화를 모든 금융기관에 알릴 수 있다.
신용도 관리는 ‘관심’이다
아주 사소한 무관심이 자신을 ‘채무불이행자’로 이끈다. 대출 상환일을 놓치는 것이나 대출을 무분별하게 이용하는 일들 말이다. 바쁜 일상을 보내다보면 내 신용도가 어떤 상태인지 일일이 챙길 겨를이 없는 게 현실이다.
그러나 그렇다 해도 반기에 한 번쯤은 자신의 신용등급을 확인하자. 흔히 하는 오해 중에, 자신의 신용등급을 조회만 해도 등급이 떨어진다는 오해가 있다. 지난 2011년 말부터는 1년에 세 번까지는 조회해도 신용도 평가에 반영되지 않는다. 주기적인 조회와 관심만 있어도 자신의 신용도가 나락으로 떨어지는 일을 절반은 막은 것이나 다름없다. 소수의 금융기관으로부터 소규모의 대출을 최대한 저렴한 이자로 받고, 자동이체를 백분 활용하는 지혜만 있다면 개인 신용관리는 더 이상 당신의 발목을 잡는 장애물이 되지 않을 것이다.
작가소개 이근형 기자
한국경제TV 경제팀 소속 기자다. 2011년부터 현재까지 기획재정부와 국세청, 고용노동부, 한국은행 등 정부 부처를 비롯, 시중은행과 제2금융권 등 금융 관련 출입처에서 활동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