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향전의 또 하나의 주인공 이몽룡은 실존 인물이라는 주장이 나와 KBS 1TV도 지난 12월 4일 밤,「역사 스페셜」로 장장 1시간에 걸쳐 많은 문헌자료를 제시하고 전문가의 증언을 곁들여 방영하였다.
즉, 이몽룡의 모델은 성이성(成以性: 1595~1664)이라는 것이다. 성이성의 부친 성안의(成安義: 1561~1629)는 1607년에 남원부사에 제수되어 1612년 광주목사로 전임되었으니, 성이성이 13세에서 18세에 이르는 기간 남원에 있었다는 추측이 가능하다. 그리고 이몽룡의 소년등과와는 다르나 성이성도 33세에 문과에 합격하였으며, 암행어사가 되어 남원에 간 사실 등 이몽룡의 행적과 유사한 점이 많다.
춘향전의 저자가 이몽룡을 등장시키면서 성이성의 행적을 참고하였을 가능성은 충분히 짐작된다. 춘향전의 창작 시기를 숙종 연대 이후로 보아도 성안의 부자에 관한 이야기가 사람들의 기억에 남아 있었다고 보겠고 성씨 집안에 전하는 기록에 접하는 일도 쉬웠을 것이다.
이 기회에 내가 춘향전의 창작 시기를 숙종 연대 이후로 보는 이유를 밝히겠다. 춘향전이 그 서두에 '숙종대왕 즉위초에... '로 시작되는 점도 그렇거니와 춘향전에 으레 등장하는 운봉영장(雲峯營將), 전라좌영(全羅左營)이 남원에서 운봉으로 이전되고 운봉현감이 좌영장을 겸임케 된 시기가 숙종 무오년(戊午: 1708)이기 때문에 그 저작 연대를 1708년 이후로 추정하고 있다.
화제를 돌려 내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그 당시의 교통·통신 사정을 살펴보기로 하겠다. 춘향전에 의하면 이몽룡의 아버지는 남원부사에서 동부승지(同副承旨)가 되어 내직으로 영전한다. 아버지를 따라 서울로 간 이몽룡도 그렇거니와 남원에 남은 춘향이도 몇해 동안 상대방의 소식을 몰랐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당시에는 우편제도도 없고 전화도 없었으니 그렇거니 생각할지도 모르나 실지 사정은 그렇지 않았다.
예전에는 관용이나 군사상 급한 통신은 역마(驛馬)를 이용하기도 했으나 대부분은 인편에 의지하였고, 일반 민간의 통신은 근거리를 제외하고는 이들 관용 통신에 편승하여 기탁하거나 아니면 그 지역을 왕래하는 여행자에게 위탁하였으니 지위가 높거나 재력이 있는 사람에게는 크게 불편함이 없었다.
특히 춘향의 고장 남원은 서울과는 640리 거리이나 7일이면 당도할 수 있다. 남원의 교통로는 다음과 같이 수도 서울과 국토의 정남방(正南方)을 관통하여 수군(水軍)의 요충지 통영(統營)에 이르는 중요 간선교 통로의 중심 지점에 위치하고 있어 웬만한 사람이면, 특히 서울과의 연락에는 불편함이 없는 그런 곳이다.
서울(京) - 전주 - 남원·운봉·함양·진주·사천·고성·통영
남원은 이밖에 도중에서 분기되어 다음 각 읍과도 연결되니 이들 남원을 경유하는 고을은 물론이고 찰발역(察訪驛), 첨사 만호진(僉使萬戶鎭), 감목관(監牧官) 등을 합하면 30개소에 이르는 관아에서 서울과 내왕하는 중간 경유지로, 특히 통영이나 좌수영에서는 5일에 한번 정도 장계(狀啓)를 올리는 정기편이 있었을 것이고 나머지 각 관아도 수시 연락편이 있었을 터이니 아마도 남원의 주막집에서는 언제든지 서울을 오가는 인편을 찾을 수 있었을 것이다.
곡성·순천·좌수영·구례·하동·남해·광양·흥양·낙안·산청·단성·곤양
이들 지방 관아는 서울에 경저소(京邸所), 즉 경주인(京主人)을 두어 수시로 서울 소식을 전하니 그 사자(使者)는 일반인의 경향간 소식이나 물품을 전달함으로써 얻어지는 촌지를 어찌 의식하지 않았겠는가. 이렇게 생각할 때 춘향이나 춘향모가 마음만 두었다면 서울로 간 전임 사또의 집안 소식을 쉽게 알 수 있었을 것이다.
더욱이 이몽룡의 부친이 전임한 자리가 동부승지다. 동부승지는 승정원(承政院)의 당상관인데, 승정원이란 왕명(王命)을 관장하는 부서로 모든 국가 정보의 중심 역할을 하기 때문에 지방 관아와 가장 접촉이 많은 곳이다. 옛날의 관보(官報) 구실을 한 조보(朝報)도 승정원에서 반포하였으며 모든 지방관이 승정원에 연줄을 대려는 판국에 남원부의 경주인도 전임 사또인 동부승지에게는 특별히 접근했을 터이니 이몽룡 일가의 동정은 소상히 남원에 전달되는 것이 순리이리라.
춘향모는 퇴기(退妓)이기는 하나 고을의 이속(吏屬)들과도 가까운 사이로 묘사되는데, 그렇다면 그들에게 이몽룡 집안의 소식을 물으면 당장 소상히 알 수가 있었을 것이다. 이몽룡의 등과(登科) 소식만 해도 조보격인 방지(榜紙)를 승정원이 발표하면 바로 각 경주인이 이를 챙겨 지방으로 전달하므로 곧 남원에도 소식이 전해졌을 것이고, 춘향이 묻기 전에 남원부의 이속에 의하여 춘향의 집에 전해졌을 것이다.
소설 춘향전은 춘향이 옥에 갇혀 사경에 이르자 비로소 방자를 서울로 보내는데, 남원 관아의 잔심부름꾼인 방자를 멋대로 부리는 춘향모라면 서울 이몽룡 일가의 소식을 몰랐을 리가 없다.
앞에서 살핀 바는 춘향전 저작 당시의 교통·통신사정이 그렇다는 것일 뿐, 작품의 시비를 따지자는 것은 결코 아니다. 작가인들 그러한 사정을 몰랐을 리가 없고 소설을 재미있게 꾸미기 위하여 그렇게 이를 전개시켰다고 보겠다.
나도 젊었던 시절 춘향전에 매료되어 여러 종류의 춘향전을 탐독하였다. 그래서인지 지난 12월 4일 밤에 방송된 TV 프로를 보고 매우 감회가 깊었다. 다만 나는 우리의 선대가 춘향의 경우와 같이 통신의 암흑시대에 살지는 않았다는 사실을 강조하고자 이 잡문을 남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