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에 우편함에 꽂혀 있는 관리비 고지서를 뽑아 펼치면서 의심했던 내 마음에 확신이라는 두 글자가 확 박혔다. 그것은 다름 아닌 수도세! 이상했다. 몇 달 전부터 수도세가 턱없이 올라가더니 이번 달에도 변함없는 것으로 보아 우리 집에서 틀림없이 누수가 생겼음을 확신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 확신이라는 것이 확인이 안 되니 답답한 노릇이었다. 한 달 전의 일이었다. 관리비 고지서를 받는 순간 문득 이상한 것이 느껴졌다. 수도세의 그래프가 계속해서 상향 곡선을 그리는 것이 찜찜하게 느껴져 생각에 잠겼다. 만약에 한 달에 보통 10~13톤 사이를 왔다 갔다 했다가 갑자기 20~23톤이 되었다면 그건 좀 문제가 생긴 것이다.
물론 어디 누수가 생긴 것은 아닌가 해서 확인을 안 한 것은 아니었다. 즉시 집안의 수도 계량기부터 시작해서 누수가 생길만한 곳은 다 뒤져보았다. 변기에서 물이 새나 귀를 쫑긋 세우고 갖다 대고 확인하고, 어디선가 물소리가 들리나 온 가족이 나서서 한번 들어보라면서 성가시게 굴었다. 아무래도 수도계량기가 고장인 것 같다는 관리소장님의 말을 존중했다. 나도 더 이상 다른 원인은 없을 것 같았다. 집안 누수 확인을 위해 서비스 업체에 의뢰하고 싶었지만 아래층에서 아무 소리가 없음에 수도계량기가 문제를 일으켜서 오버한 것으로 짐작하고 새로 교체했다. 그러나 이번 달에도 수도요금은 20년 동안 살림하면서 한 번도 찍은 적이 없었던 수도량을 찍고 있었다. 아, 이게 바로 귀신이 곡을 한다는 것이구나. 정말로 귀신이 장난을 하나싶어서 빨래를 돌리면서 거실 바닥에 누워 멍히 천장을 올려다봤다. 답이 없었다. 그래서다시 하나하나 짚어보았다. 싱크대, 화장실, 베란다 수도, 세탁기… 하다가 문득 이상하게 들려오는 세탁음에 벌떡 일어났다.
모든 세탁기들이 그렇겠지만 세탁 양에 따라서 물 조절을 하게 되어있다. 나도 세탁 양에 따라서 수돗물의 양을 조절하는 데 어느 정도 물이 차오르면 물소리가 그쳐야 하는데 물소리가 너무 길게 났던 것이다. 달려가 보니 물이 세탁기 가득 차 있었는데 내가 맞춘 중간까지 차오르지 않고 제멋대로 최고 높은 수준까지 차 있었던 것이다. 1단계에 맞춰도 물은 10단계 최고조까지 차올랐으니 그동안 세탁으로 인해 물 사용량이 늘었던 것이다. 정말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문제가 있었던 것이다.
만세를 불렀다. 조금 귀찮더라도 항상 물의 양을 조절하면서 빨래를 했던 것에 나 자신을 칭찬하면서 자동이 아닌 수동으로 물의 양을 맞추니 그제야 제대로 작동이 되는 것 아닌가.
알고 나면 별 것 아닌 이 진실 앞에서 허무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더 큰 일이 아니란 사실에 감사하면서 세상은 정말로 내가 짐작할 수 없는 상황이 언제라도 닥칠 수 있는 것이고, 그런 일들을 하나하나 해결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인생 아닌가 싶었다. 작고, 사소하고, 가벼워 보이는 이런 일들이 우리 생활을 얼마나 많이 지배하고 있는지 알게 되었다. 그러니 작고, 사소하고, 가벼운 일을 우습게 여겨서도 안 되고, 크고 중요한 일만이 대단한 것이라고 착각해서도 안 될 것 같았다. 우리의 삶은 이처럼 작고, 사소하고, 가벼운 일들에 의해 이뤄지며, 이런 일들로 인해 한 번씩 깨우침을 얻기도 하는 것이기에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