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글밭
글. 김희용(경기도 수원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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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 시골에서 농사를 지으며 가난하게 살았다. 당시 호롱불을 켜고 살았고 겨우 굶주림을 면할 정도의 생활이었다. 라디오는 매우 비싸 구입도 어려웠다. 매일 논과 밭에서 농사일을 하며 중학교에서 배운 영어 실력으로 해외 펜팔을 하는 것이 유일한 취미였다. 우표 30원짜리 10장을 서울에 있는 해외 펜팔 소개소에 보내주면 해외 펜팔 할 수 있는 주소를 보내 주었는데 미국, 뉴질랜드, 필리핀에 사는 또래의 여성 친구들이었다. 우선 한글로 계절 인사, 나의 주변 이야기, 국가의 행사 등을 적어 놓고 영어로 사전을 뒤져가며 번역을 하고 영어 필기체로 아주 얇은 종이에 볼펜으로 정성 들여 써 항공편지 봉투를 구입하여 보내곤 했는데 그 당시 항공 우편요금이 편지 무게 5g 이내로 120원 정도였는데 요금을 초과하지 않도록 아주 엷은 종이에 빼곡하게 써 보냈다. 한 번 편지를 보내면 약 3주 후에 답장을 받곤 했다. 그 당시 빨간 자전거를 타고 다니던 집배원 아저씨는 정모(正帽)를 쓰고 배낭을 멘 채 오후 3시쯤 우리 마을에 오시곤 했는데 답장이 올 쯤에는 농사일을 하면서 자전거 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기도 하였다. 해외에서 주고받는 편지는 검열이 있었지만 다행히 한 번도 문제가 된 적은 없었으나가끔 훼손된 것을 보기도 했다.
답장을 갖고 오시는 집배원 아저씨가 그리 반가울 수 없었다. 영어로 쓴 주소는 한글로 번역이 되어 편지 겉봉투에 적혀 있었고 우편번호는 집 코드(zip code)를 사용하여 처음에는 이해하기 어려웠으나 반복되다 보니 집배원 아저씨께서도 바르게 이해하게 되었고 편지는 내게 매우 반갑고 귀한 손님이 되었다. 미국의 Kathy, 뉴질랜드의 Mary, 필리핀의 Maria는 나의 10대 후반과 20대 초반을 함께 해준 몇 안 되는 친구들이었다. 그 당시 필리핀은 우리나라보다 앞선 선진국이었는데 오늘에는 대한민국이 더 앞서가는 나라가 되었다. 편지에는 우표가 항상 있었는데 그 당시에는 우표 수집도 귀한 취미여서 매우 소중했다. 친구들과의 펜팔은 그들이 결혼하기 전까지 거의 7년 정도 계속되었다. 친구들이 보내준 사진과 편지들은 스케치북에 스크랩하여 보관했는데 바쁘게 살다 퇴직을 하고 찾아보니 잦은 이사로 버려진 것 같다. 난 가난해서 사진 한 장 보내지 못했다.
50년이 훌쩍 넘은 요즈음 현업에서 은퇴를 하고 지난날 보릿고개를 한 번 넘어야 일 년을 살 수 있었던 그 시절을 회상하며 ‘나이 들면 추억을 먹고 산다’는 말을 실감한다. 농사일을 하며 편지를 쓰고 집배원 아저씨를 기다리던 시절의 소년이 되어 본다. 요즈음에는.
고객참여
강산이 두 번 넘게 바뀌고 만난 초등학교 동창들
글. 최은숙(경기도 광주시)
배움의 즐거움
글. 장희지(대구시 북구)
겨울풍경
글. 권성형(대구시 동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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