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먹고 난 아이가 어쩐 일인지 머리를 감고 나왔다. 평소 같았으면 머리 좀 감으라고 성화를 내도 내일 내일 하면서 미루었을 텐데 싶어, 무슨 일이 있느냐고 물어보니 방학 기간이지만 중학교 행정실에 입학 준비서류를 갖다 주고 와야 한다는 것이다. 그 말을 듣고 “잊으면 안 되는 일이면 지금 당장 갖다 내고 오라고” 말하면서 자연스레 헤어드라이어를 집어 아이의 머리카락을 말려주기 시작했다. 그때 녀석이 앉아 있던 의자가 조금 흔들거리면서 삐걱 소리를 내었다.
그 소리에 웃으면서 “20년 된 의자다”라고 말했다. 의자의 상태가 그렇게 된 것은 세월이 그만큼 흘렀기 때문이라는 걸 이해해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엄마가 결혼할 때 산 의자다”라고 덧붙였다. 그랬더니 아이가 “언제 결혼하셨는데요?”라고 묻는다. “20년 전에”라고 짧게 대답해 놓고 보니 우문현답 같기도 하고, 현문우답 같기도 해서 깔깔깔 웃었더니 정작 아이는 우습지 않은지 아무 소리 없이 머리만 숙이고 있다.
“엄마가 결혼할 때 샀던 식탁용 의자 네 개가 이 방에 한 개, 저 방에 한 개, 주방 식탁용 의자로 두 개 있네. 부서지지 않고 참 오래 잘 버티고 있네. 텔레비전, 세탁기는 벌써 고장 나서 새것으로 샀고, 냉장고도 작년에 바꿨고, 압력밥솥도 바꿨구나.”
내 말에 아이는 “사람이 늙는 것처럼 물건들도 늙는 건가요?” 하고 철학자처럼 질문인지 답인지를 모를 말을 한다. “그렇지. 물건도 새것일 때보다는 쓰다 보면 점점 낡아지잖아. 사람이나 물건이나 제 값을 다하면 저세상으로 가는 거야.”
말을 하다 보니 조금은 슬퍼지는 것 같고, 20년 동안 우리 집에서 사느라 애써 준 의자한테도 고마운 마음이 들어 “의자도 고생했네. 20년 동안 매일 우리 가족 엉덩이를 잘 떠받쳐 주느라 참 고생 많았다. 얼마나 힘들었을까? 삐거덕거리지 않으면 그게 더 이상한 거지. 잘 버텨줬어” 하며 마치 스스로를 위로하듯 토닥토닥 칭찬해 주자고 했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아이가 깔깔깔 웃으며 “햇볕 좋은 날에도 좋았고, 비가 올 때도 좋았고, 눈이 올 때도 좋았고, 좋지 않은 날에도 나는 좋았다. 엄마, 의자 도깨비가 하는 말이에요” 하며 웃더니 “하지만 엄마 우리 집에 그대로 있는 게 있어요. 바로 책이에요. 책은 변하지 않아요”라고 말한다. 그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렇구나. 책은 변하지 않는구나.’ 결혼하기 전부터 갖고 있던 책들을 몽땅 싸 가지고 왔었다. 20년이 흐른 지금도 책장 속 책들은 고스란히 꽂혀 있다.
“저는 우리 집에 책이 많아서 좋아요. 꼭 서점 같잖아요. 은근 분위기 있어요” 하는 말에, “그래, 책은 몇십 년이 흘러도 그대로구나. 젖거나 불에 타지 않으면 말이야” 하면서 언제나 친구가 되어주는 책들에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바쁘다는 이유로, 살기 어렵다는 이유로 소원했다면 앞으로 조금 더 친해져야겠다. 오늘 하루 시간을 내어 책을 읽는다면 그 시간이 쌓이고 쌓여 얼마나 큰 보물이 될까? 비단 책뿐만이 아니라 모든 일에 시간이 싸이고싸이면 보물이 될 것을 믿고 오늘 하루도 즐겁게 노력하며 열심히 살아야겠다.
“내일은 햇볕도 바람도 좋을 테니 서점 나들이 어떤가, 아들?” 드라마 <도깨비>의 주인공 공유 스타일로 나직하고 부드럽게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