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동네 자전거 대리점이 새 단장을 했다. 조립식 단층에서 2층 복층으로 규모를 확장해 전시 공간도 훨씬 넓어졌고 전면이 통유리로 바뀌었다. 이곳을 지날 때면 자연스레 다양한 자전거가 진열된 가게 안을 들여다보게 된다.
어느 날, 자전거 대리점 앞에서 힘 빠진 바퀴를 탓하는 어르신을 만났다. 얼굴은 고단하게 살아온 세월의 흔적이 역력했지만 왜소한 체구에도 불구하고 목소리는 쩌렁쩌렁했다.
“자전거 빵꾸 때우는 데 공짜여?”
순간 내 머릿속에 마흔여섯의 젊은 나이로 돌아가신 아버지와의 아련한 추억이 생각났다. 아버지는 내가 중학교 1학년이 되던 음력 5월 단오날 돌아가셨다. 한참 사춘기로 접어 들 때였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집안 형편은 더 어려워졌다. 몸이 아픈 엄마와 아버지가 안 계신다는 현실은 숨기고 싶은 상처였다.
아버지는 집배원이셨고, 늘 무거운 행낭을 메고 자전거를 타고 마을 구석구석까지 희로애락을 전달하셨다. 아버지는 집에서 싼 점심 도시락을 가지고 다니셨는데, 숙직을 하는 날에는 딸만 다섯인 우리 집의 둘째인 내가 저녁 도시락을 챙겨서 갖다 드렸다. 나보다 먼저 도시락을 배달하던 언니는 중학생이 되었고, 동생들은 아직 학교에 다니지 않을 만큼 어렸기 때문에 초등학생인 내가 심부름을 하기에 적당했다. 그때 내 눈에 강릉우체국이 얼마나 커 보였던지 사무실을 찾아가면 문도 제대로 열지 못한 채, 얼굴만 내밀고 작은 목소리로 아버지를 찾곤 했다. 아버지는 나를 반갑게 맞아주시며, 점심 때 드신 검정색의 낡은 도시락 가방과 함께 심부름 값으로 10원짜리 동전 두세 개를 내 손에 쥐어 주셨다. 나는 넙죽 인사를 하고 명주동에서 홍제동 집까지 신나게 걸어왔다.
어느 날은 아버지의 숙직 근무가 갑자기 바뀌어 미처 집에 연락이 되지 않은 상태에서 저녁 도시락 심부름을 간 적도 있다. 그런 날에는 아버지의 자전거 뒤쪽에 앉아 집까지 자전거를 타고 올 수 있었다. 아버지의 허리를 꽉 붙잡고 바람을 피했지만 자전거 뒷자리가 무서워 눈을 꼭 감았다. 그때마다 아버지가 돌리는 자전거 페달의 바퀴 소리가 몹시 무겁게 느껴졌다.아버지가 타고 다닌 자전거는 우리 일곱 식구의 생계 수단이었고 없어선 안 될 운송수단이었다. 아버지의 월급날에는 아버지가 사 오신 귤과 굴뚝과자가 어찌나 반가웠는지 모른다. 아마도 어린 시절의 나는 아버지를 기다린 게 아니라 맛난 간식을 기다렸는지도 모른다.최근 명주동에서 포남동으로 건물을 신축해 이전한 강릉우체국 앞을 지날 때마다, 우편물을 가득 싣고 오토바이를 타고 거리를 누비는 집배원 아저씨를 볼 때마다, 자전거를 타고 우편물을 배달하시던 아버지가 생각난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사십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빛바랜 사진 속에 남아 있는 아버지를 생각하면 언제나 그립고 애잔하다. 아버지, 정말 보고 싶고 오랫동안 불러 보고 싶은 이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