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글밭
글.홍경석(대전광역시 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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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인 어르신께서 십여 년째 요양원에 계신다. 그래서 아내와 함께 이따금 찾아뵙는다. 물론 빈손으론 갈 수 없기에 이것저것 사 들고 간다. 지난주 쉬는 날에도 요양원을 찾았다. 하지만 담당 간병인 아줌마는 장인 어르신께서 모 병원에 진찰을 받으러 가셔서 안 계신다고 했다. 불안한 마음에 “어디 안 좋은 데가 있으신가요?” 물었더니 그건 아니고 감기 기운 비슷한 것이니 걱정은 안 해도 된다고 했다. 20여 분을 기다렸으나 오실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그날도 야근에 들어가야 했기에 함흥차사로 더 기다리기가 뭣해서 5층의 장인 어르신 입원실로 올라갔다. 그리고 들고 간건강음료 세트를 또 다른 간병인 아줌마에게 드리고 나왔다. 그랬는데… 다시금 야근을 마치고 나와서 쉬는 날이었던 어제 아침에 발생한 ‘웃픈’, 그러니까 웃기다와 슬프다의 합성어인 어떤 해프닝이 발생했다.
정성이 부족한 우리 부부와 달리 처형과 손위 동서 형님 부부께선 매주 1회씩 장인 어르신께 문병을 가신다. 얼마 전에도 요양원을 찾았는데 장인 어르신께서 입원해 계시는 방에 내가 두고 온 건강음료 세트를 보셨단다. 하여 “누가 왔다 갔나요?”라고 물었다나. 그러자 간병인 아주머니께서 “네, 며칠 전에 칠십 넘은 노인네하고 (그에 비해) 비교적 젊은 여자가 같이 왔었어요. 그러나 어르신께서 병원에 가시어 오시지 않자 그만 이걸 두고 가셨지요”라고 했단다. 하지만 아무리 곰곰 생각해봐도 짚이는 사람은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다고 했다. ‘그렇다면 혹시?’ 아내와의 통화 끝에 물어본 결과, 주인공이 바로 나였던 것이다. 처형의 그 얘기에 아내는 박장대소를 했단다. 그 얘길 듣던 순간, 나 역시 어이가 상실되면서 급기야 입에 들어가던 밥과 반찬이 일시에 식탁으로 총알처럼 튀어나오고 말았다.
나는 올해 육십도 안 된 불과(?) 59세의 중년이거늘. 노년(老年)이라함은 확연히 나이가 들어 늙은 때와 명실상부로 늙은 나이를 가리킨다. 이런 관점에서 2년은 더 지나야 비로소 회갑을 맞는 나에게 벌써부터 ‘70대 노인’ 운운한 것은 분명 망발(?)의 극치가 아닐 수 없었다. 물론 내가 어려서부터 풍찬노숙으로 잔뼈가 굵었고, 산전수전에 이어 공중전까지의 갖은 고생담이 수북하다는 것은 솔직히 인정한다. 아울러 지금도 주근보다 야근이 두 배 많은 박봉의 경비원으로 살자니 꽤 힘든 것도 사실이다. 현실이 이러하기에 평소 기왕이면 다홍치마라고 화장품도 고급을 사용한다. 근무하는 날에야 경비원 특유의 복장은 어쩔 수 없으되 휴일엔 아내가 골라준 멋진 옷으로 입으며 게으름을 피우지 않는다.
생로병사는 누구도 거역할 수 없는 명제다. 따라서 세월처럼 계속 쌓여만 가는 이마와 눈가의 주름을 보톡스 따위로 개선하는 방법 또한 일시적 면피(免避)의 방법일 뿐이다. 다만 바라는 건 “나이에 걸맞지 않게 지금도 왕성한 활동이 대단하세요!”라는 칭찬은 여전히 듣고 싶다는 것이다.
끝으로 장인 어르신을 모신 요양원의 그 간병인 아주머니에게 묻고자 한다. “나에게 칠십 넘은 노인네라고 지칭한 건 그렇다 칩시다. 근데 나랑 동행한 내 아내를 일컬어 ‘젊은 여자’라고 했다죠! 내 마누라는 나보다 불과 한 살 아래인 쉰여덟 살이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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