첨단기술 개발이 선진국으로 가는 유일한 길
한국이동통신이 4월 12일부터 서울지역에 CDMA방식의 이동전화를 공급하기 시작했다. 지난 1월 인천 · 부천지역에서 처음으로 보급해 성공을 거둔 한국이동통신은 4월 1일에는 대전지역으로 다시 10여일 후 에는 서울지역으로 보급 지역을 넓힘으로써 본격적인 CDMA시대를 열고있다.
CDMA 이동전화의 보급은 두가지 면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첫째는 아날로그시대에서 디지털시대로의 변화를 의미한다. 기존의 아날 로그방식의 이동전화는 가입자 수용 능력이 부족하고 통화 품질도 불량하여 만족할 만한 서비스를 제공하지 못했다. 이에 비해 디지털방식의 이동 전화는 가입자 수용 능력이 풍부하고 통화 품질이 우수하다. 가입자 수용 능력이 기존의 방식에 비해 이론상으로는 20배, 현재의 기술로는 최소한 10〜14배 이상 된다. 그러니까 현재의 아날로그 방식보다 10배 이상 이용자들에게 이동전화를 공급하면서도 선명한 통화를 보장할 수 있어 만족할만한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다는 이야기이다.

둘째는 이동통신 분야에서 우리나라가 세계 최고의 기술국임을 과시하는 것이다. 1989년 CDMA기술을 최초로 발표한 것은 미국의 퀄컴(Qual-comm) 이라는 회사였는데, 우리나라는 그 기술을 사오기로 하고 1991년 5월 전자통신연구소가 퀄컴과 기술 도입 및 공동개발 협약을 체결했다. 이어 국내의 공동개발 참여업체로 금성 · 삼성 · 현대가 선정된 것은 1992년 12월이었으므로 개발 주체인 3개 기업이 개발에 착수한 것은 그 후의 일이다. 그런데도 원천기술의 보유국인 미국에서도 상용시험만 하고 있을 뿐 본격적인 서비스는 제공하지 못하고 있는데도 뒤늦게 뛰어든 우리 기업들이 CDMA라는 최첨단 이동통신 기술의 개발에 성공하여 본격적인 서비스 경쟁에 뛰어들고 있으니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디지털 이동통신기술 중에서도 최첨단 방식인 CDMA 기술 개발은 전 자통신연구소와 공동개발 참여업체로 선정된 금성 · 삼성 · 현대 · 맥슨 등 4개 기업이 공동으로 추진했는데, 그 중에서 맥슨은 단말기 개발에만 참여 했다. 1990년 1월 체신부가 디지털이동통신개발계획을 수립할 때는 한국 통신과 한국이동통신의 출연을 전제로 했으나 도중에 한국통신은 빠져 버렸고, 전자통신연구소가 퀄컴과 두차례에 걸쳐 CQMA 기술 도입 및 공 동개발 협약을 맺어 연구소는 퀄컴에 기술도입비를 지불하는 대신 퀄컴은 국산 시스템의 개발에 필요한 기술을 지원하기로 하고, 연구소는 그 기술을 전수받아 참여업체에 기술 지원을 하는 한편 공동개발을 주관하기로 했 다. 그러나 그들의 기술 지원을 받아 실제로 CDMA 시스템을 개발한 것은 공동개발에 참여한 3개 기업이었는데, 그들 역시 별도의 기술도입비를 지불하며, 퀄컴과 공동개발 협약을 맺었다. 그렇게 해서 퀄컴에 지불한 기술도입비는 5천만불이라는 막대한 것이었다.
그러한 공동개발 체제가 갖추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연구소와 개발 3사간은 물론 개발 3사 사이에도 원활한 협조 분위기가 조성되지 않자 체신부는 1993년 8월 장관 자문기구로서 전파통신기술 개발추진 협의회를 설치하는 한편 한국이동통신에 는 이동통신기술개발사업관리단을 설치케한 다음 두 기구의 장에 같은 사람인 서정욱 전 과기 처차관을 앉혔다. 그러자 그때부터 연구소와 3개 기업 사이에 치열한 경쟁과 원활한 협조체제가 이루어지면서 개발작업이 급피치를 올리기 시작 했고, 본격적인 개발작업을 시작한 지 2년여만에 기술 개발은 물론 상용서비스 시험까지 마칠 수 있었다.
아무튼 공동개발을 주관하고 참여업체에 기술 지원을 한 것은 전자통신연구소였고, 연구소와 퀄컴의 기술 지원을 받아 상용 시스템을 개발한 것은 3개 기업이었다. 그런데도 지난 4월초 정부 가 CDMA 개발 유공자에게 내린 훈장에서 1등 상인 금탑산업훈장을 받은 사람은 서정욱 단장이 었고, 개발 주체인 전자통신연구소의 이혁재 · 한기철 연구원에게 주어진 훈장은 각각 동탑산업훈장과 철탑산업훈장이었다. 한 마디로 정부가 서정욱 사장을 1등공신으로 꼽아 주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이동통신 부설기관으로 설립된 이동통신기술개발사업관리단장의 역할은 어떠한 것이었으며, 실제로 서정욱 단장이 한 일은 무엇이었을까? 또한 CDMA의 개발 의미는 무엇이며, CDMA 시스템이라는 최첨단의 이동통신 기술을 개발하여 세계 최초로 상용화하는 데는 어떤 어려움이 있었을까? 개 발사업관리 단장에서 한국이동통신사장으로 변신해 있는 서정욱 박사와의 대담으로 풀어보기로 한다.
국방과학연구소의 창설 멤버로서 군 통신기기의 개발 전문가였던 서정욱 박사는 국방과학연구소장까지 역임한 다음 1984년 1월 한국통신 TDX 사업단장으로 임명됨으로써 전자교환기라는 또 다른 분야의 기술 개발과 인연을 맺게 되었다. 거기에서 그는 특유의 추진력과 설득력, 그리고 부지런함으로 TDX 개발 주체인 전자통신연구 소의 연구원들은 물론 산업체의 연구원들까지 독 려하여 그 성공이 극히 의심스러웠던 TDX 개발 사업을 성공으로 이끌었고, 그러한 공로로 한국 통신 부사장까지 역임했다. 그 후 1991년에 과기처차관, 다시 1992년에 KIST 원장을 거쳐 1993년에 개발사업관리단장으로 자리를 옮긴 다음 다시 1995년에 한국이동통신 사장으로 변신했던 것이다.
이처럼 서정욱 박사는 잇달아 국가적인 대형 연구개발사업을 성공으로 이끌면서 연구소와 관계, 산업계의 요직을 두루 거친, 찬란한 경력의 소유자로서 우리나라 과학기술계의 큰 재목으로 우뚝 서 있다.
—— TDX에 이어 CDMA라는 또 하나의 대형 연구개발사업을 성공으로 이끄셨는데, 우선 소감부터 말씀해 주시죠.
“세상에 거저 되는 것은 하나도 없는 법입니다. 저는 연구개발이 농사 짓는 것과 똑같다고 봅니 다. 이것도 하나의 창조업이니까요 씨에서 싹을 틔워서 묘목을 만들고 키워서 가지를 쳐주고 병충해를 방지하고 주변의 잡초를 제거해서 좋은 열매를 맺게 해줘야 합니다. 또 열매가 좋다 해도 요즘 국광이나 홍옥을 누가 사갑니까. 맛이 틀리죠. 그처럼 하나의 서비스 상품을 개발한다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에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 노력을 하지 않고 쉽게 살려고 하죠”
—— 이제 CMDA방식의 이동전화 서비스를 서울지역에서도 시작했는데, 현재의 서비스 수준에 대해 만족하십니까?
“이제 저희는 다 자란 나무를 베어다 집을 짓고 가구를 만드는 입장이 아니고 묘목을 심은 겁니다. 그러니까 앞으로 그 나무를 잘 키우는 게 과제라 하겠죠. 우리가 기존의 완성품을 들여왔을 때와는 마음 자세가 달라야 됩니다. 우리 스스로 개발한 것이기 때문에 서비스나 모든 것을 이제부터 완숙시켜야 합니다.
우리가 온갖 어려움을 무릅쓰고 첨단기술을 개 발해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선진국으로 가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미국 · 독일 · 일본 사람들이 왜 국제사회에서 격높은 대접을 받습니까? 이목구비에서 차이가 나는 게 아니라 그들은 남들이 못한 일에 도전해서 성사시킨 사례가 많기 때문입니다. 정보통신에 관한한 우리가 첨단서비스를 상용화한 것은 CDMA가 처음입니다. 금년이 광복 50주년입니다만 정보통신기술의 도전에 있어서 이제야 우리가 광복을 했다고 보고 싶습니다.”
—— 기술적인 측면에서 볼 때 CDMA 기술이 어느 정도 안정돼 있다고 생각합니까?
“기존의 아날로그 방식은 기술적인 면에서 어려운 점이 있었어요 혼신도 있고 잡음도 있었죠. 더욱 문제가 되었던 것은 그 주파수대내에서 수용할 수 있는 가입자 수를 초과하다 보니까 병목 현상으로 교통이 마비되는 현상이 있었던 거죠. 그렇다면 가입을 억제하면 되지 않겠느냐고 하겠지만 소통이 잘되는 동네에서 가입해서 안되는 동네에 와서 쓰는 것은 막을 방법이 없습니다. 서울은 체중이 심하지만 지방은 괜찮기 때문에 지방에서의 가입까지 막을 수가 없다는 거죠. 이게 아주 고통스러운 일이었습니다. 또 가입 자체를 막아 버리면 과거처럼 암거래가 생겨 사회 문제로 대두될 겁니다.
이것을 해결하자면 기술로 도전할 수밖에 없는데, 그 기술을 선택하는 과정에서 CDMA로 결정했던 것은 잘한 일이었습니다. 정부와 전자통신연구소가 훌륭한 일을 한 거죠. 다행히 CDMA 방식은 가입자 수용 능력이 좋고 품질이 우수해서 아날로그방식이 안고 있는 문제점을 해소하리라 봅니다.”
—— 현재의 아날로그 방식에 비해 가입자 수용 능력이 몇배나 될까요?
“10배 정도로 보고 있습니다.”
—— CDMA 방식의 서비스가 시작되자마자 기존 아날로그 방식의 단말기 가격이 떨어지는 현상이 생기는데, 앞으로 기존 방식과 CDMA 방식의 공급 비율을 어느 정도로 할 생각입니까?
“시스템의 완성 시기에 맞춰서 단말기 공급원이 적어도 3〜4개 있었으면 좋겠는데, 현재는 하나밖에 없어서 수요를 따르지 못하는 게 안타깝습니다. 때문에 초기에는 아날로그 가입자들이 CDMA 쪽으로 옮기는데도 어려움이 있겠지만, 긴 안목으로 본다면 CDMA가 들어옴으로 해서 아날로그 서비스의 품질도 좋아지게 됩니다. 아날로그에서 CDMA로 옮기면 그만큼 여유가 생길테니까요”
—— 이제부터 공급되는 단말기는 CDMA용입니까?
“현재 공급되는 단말기는 겸용입니다. 그러나 어느 단계가 지나면 CDMA 전용도 공급할 겁니다. 단말기는 저희 회사가 직접 다루지 않기 때문에 시장 기능에 따라 결정될 겁니다.”
—— 서사장님이 CDMA 개발에 참여하게 된 것은 1993년 8월 체신부가 장관 자문기구로서 전파통신기술개발추진협의회를 설치하는 한편, 한국이동통신에 이동통신기술개발사업관리단을 설치케 한 다음 두 기구의 장 자리인 의장과 단장을 맡김으로써 시작된 것인데, 정부에서 각각 기능이 다른 기구의 장을 한 사람에게 맡겼던 이유는 뭘까요?
“저는 사실 그런 사업이 진행되고 있다는 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맡았는데, 어느 날 체신부장 · 차관님이 함께 부탁하셨을 때 갈등을 했습니다. 정부의 부탁을 뿌리칠 수는 없지만, 한편으로는 전자통신연구소가 몇년 해오던 사업을 제가 맡는 다는 것은 개인적으로 득이 될 게 없는 일이었죠 · 정부가 왜 그런 부탁을 할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또 한번 사역노동을 해보자는 것이었지 결코 즐거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 그 당시 체신부가 세계적으로 입증된 기술인 TDMA 를 젖혀놓고 아직 입증이 안된 CDMA를 개발하기로 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사람에게 인격이 있듯이 나라에도 國格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개발도상국으로 남느냐 선진국을 지향하느냐는 마당에서 어떤 기술을 개발할 때도 격이 있다는 말씀이죠. 원천기술 보유국에 서는 우리가 원하는 TDMA라는 기술을 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한국 같은 중진국은 완성품을 사다 쓰는 것이지 기술을 가져갈 수는 없다는 거죠 그래서 국내 개발을 할 수밖에 없었는데, 기왕 도전할 바에는 첨단기술에 도전해 보자는 생각에서 CDMA를 선택했던 게 아닌가 싶습니다.”
—— 사업관리단장 자리를 맡은 다음 개발 가능 성이 불투명한 CDMA 대신 이미 외국에서 쓰 고 있는 TDMA를 검토해 보겠다는 생각은 안 하셨습니까?
“그때는 이미 시기가 늦었습니다. 벌써 엄청난 돈을 투자했고, 시간이 다 지나 새로 출발한다는 것은 생각하기 어려웠죠.
—— 정부가 한국통신과 한국이동통신의 출연을 전제로 디지털 이동통신개발계획을 수립한 게 1990년 1월이었고, 그 후 1991년 5월에도 전자통신연구소와 퀄컴간에 1단계 CDMA 기술 도입 및 공동개발 협약을 맺었으며, 다시 1992년 7월 에 2단계 공동개발계약을 맺었고 그해 12월에는 국내 공동개발 참여업체로 금성 · 삼성 · 현대 · 맥슨 등 4개 기업을 선정했기 때문에 사업관리단이 발족한 1993년 9월에는 어느 정도 연구개발 실적이 쌓였을 것으로 생각되는데, 당시의 진도는 어느 정도였습니까?
“실적이라 할만한 게 없었죠. 그래서 새로 시작했었죠 CDMA를 개발했다고 해서 쓸 사람은 연구소도 아니요 금성 · 삼성 · 현대도 아니고 바로 사업자입니다. 그런데 사업자의 요구도 모르고 어떻게 개발에 착수할 수 있습니까.
1993년 크리스마스 이브날에 제가 사용자의 요구사항을 최초로 내놓았습니다. 이렇게 해야 된 다는 것을 처음으로 만들어 내놓은 거죠. 그 전 에는 뭘 했는지 손에 잡히는 게 없었어요. 기업 들도 구체적으로 뭘 한 게 없었어요. 퀄컴에서 준 기술을 연구소가 받아 기업에 전수해준 정도 인데, 그것은 기업이 직접 받아서 할 수 있는 거죠.
퀄컴이라는 회사가 기술의 원천임에는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하나의 벤처기업이지 시스템을 다룰 수 있는 회사는 아닙니다. 아직도 퀄컴은 하나도 제품을 내놓은 게 없어요. 단말기만 내놓 았죠.”
—— 그 당시 사업관리단장의 입장에서 느끼는 가장 심각한 문제점은 무엇이었습니까?
“과거의 TDX와 같은 방식으로 몇개 업체가 공동개발을 한다는 것은 이미 시대에 맞지 않는 사상입니다. TDX 개발 때도 그것이 안된다는 게 입증됐죠. 이미 각사는 각자의 모델로 발전시켜 수출도 하고 있죠. 다시 말해, 사회주의나 개도국과 같이 획일화된 연구개발 개념을 적용하려고 했던 것은 접근 방법에 있어 시대에 뒤떨어진 거였죠.
참여 기업들이 기술 원천과 직접 접촉해서 추진했더라면 더 빨랐을 겁니다. 연구소가 기술 원천을 갖고 있지 않는데, 어떻게 돕겠습니까. 그것을 바로잡는 게 큰 일이었죠.
시간만 넉넉히 준다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겠는데, 시간도 부족했고 돈도 다 써 버렸어요. 그래서 세 업체를 경쟁시켜서 하나라도 건져야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세 사람이 다 물에 빠져서 허우적거리는 것보다는 하나라도 건져야 된다는 생각이었죠. 그러다 보니 세 사람이 다 살게 된 거죠”
——업체도 전혀 준비가 안된 상태였나요?
“업체는 그러한 여건의 관리방식으로는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잘 움직이지 않았죠.”
—— 그 당시 기술개발방식은 분담체제였나요 경쟁체제였나요?
“그것도 분명치가 않았어요 일을 주도하는 사람들 자체가 그 기술에 대한 전문가가 아니었기 때문이죠. 그들은 한다고 했겠지만 공공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개발한다면 관리방식 자체가 잘못된 거였죠. 그것은 기술만 가지고는 안된다는 뜻이 내포돼 있는 거죠. ”
—— 이동전화라면 크게 교환기 · 기지국 · 단말기 세 분야로 나눠 볼 수 있는데, 그 당시 우리 기술 수준으로 볼 때 개발하기 어려운 핵심 기술은 어느 부분이었습니까?
“그 동안 외국에서 도입했던 중요한 기술은 CAI( Common Air Interface) 였는데, 그게 중요하긴 하지만 하나의 다원접속방식에 불과합니다. 기본적으로는 네트워크 기술과 교환기 기술이 중요하죠. 그런데 전자통신연구소가 처음부터 교환기를 개발하는 팀에다 이 일을 맡겼더라면 좀더 잘했을 텐데 시스템 개념이 부족한 무선분야의 팀에다 맡겼기 때문에 사업자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던 겁니다.
연구개발정책 전개도 세월이 흐르면 거기에 맞게 변해야 됩니다. 1980년대의 정보통신 시스템 개발의 개념은 독점체제에서 연구개발 환경기초를 닦는 의미의 공동개발이었지만, 이제는 상품의 개성화 때문에 그래서는 안됩니다. 아직도 TDX처럼 해야 된다고 떠들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데, 전근대적인 생각이죠.”
—— 그 당시 참여업체 3사와 연구소 · 정부 · 사업자간의 관계를 설명하면서, 삼성은 체신부 출입 금지, 금성은 ETRI 출입 금지, 현대는 한국통신 출입 금지라 표현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 말씀이 연구소와 3사의 관계를 축약적으로 얘기 한 것 같죠?
“제가 단장직을 맡기 전의 관계를 말하는 것 같습니다. 한 회사는 독자적인 길을 가겠다고 했을 것 같고, 한 회사는 CDMA 개발은 그런 방식으로 해서는 안된다고 했을 것이고, 또 한 회사는 나도 한 몫 끼겠으니 교환기 기술을 내놔라고 했을 겁니다. 네 사람이 하는 식사에 한 몫 끼겠다니 좋아할 리 없죠 당시의 상황을 웅변적으로 얘기하는 것 같습니다.”
——기술 제공 회사인 퀄컴은 벤처기업이라 하셨는데, 퀄컴은 어떤 회사입니까?
”한 마디로 기술 혁신을 통해 요소기술을 파는 회사죠. 역사는 오래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엄청난 기술료도 받고 주가도 올라갔으나 시스템을 몰라 우리에게는 협력하기 좋은 회사가 아니었을지 모릅니다.”
—— 퀄컴에 기술료로 5천만불을 지불했다는데, 퀄컴의 기술은 완벽한 것이었나요?
“트랜지스터는 분명히 미국의 발명품이죠. 그러나 그것을 갖다 산업화해서 국가 경제를 도운 것은 일본의 과학자이듯이 우리도 퀄컴의 기본 기술은 갖다 썼을지 모르지만 그 원리 자체는 퀄컴의 것이 아닙니다. 원천적으로는 군사 기술이죠. 그것도 제가 1970년대에 국방과학연구소에서 다루던 기술이죠. 그 기술의 본질을 알기 때문에 다른 사람보다는 그 기술에 대해 거부감이 적었습니다. 그런데 퀄컴이 한 것을 보고는 ‘이 회사가 머리는 좋은 집단인지는 모르겠으나 시스템을 운영할 사람은 아니다. 시스템은 우리가 운영해 나가야 되겠다. 가능하면 그들의 지혜는 덜 빌려 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제 접근 방법이었죠.
우리가 퀄컴에게 배운 기술은 원천기술이었어요. 그러나 상품으로서 응용하는 시스템을 개발하는 게 더 어렵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교환기와 네트워크 운용기술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쉽게 적응이 된 거죠.”
——그러한 상황에서 사업관리단장직을 맡아 기술 개발 방향을 어떻게 잡아 나갔습니까?
“먼저 이렇게 되어야 한다는 사용자 요구사항을 제시했고, 여러가지 불편을 주는 주변의 간섭 같은 것을 정리해 줬습니다. 연구소에 파견된 업체의 연구인력을 업체로 돌려 보내도록 해서 업체에 100% 자율을 주도록 했죠. 연구소에 남아서 끝까지 연구개발을 하겠다면 하게 하고 자기 공장에서 하겠다면 그렇게 하도록 자유를 준거죠”
—— CDMA 기술 개발 관련 기관간의 역할 분담을 살펴보면, 퀄컴은 국산 시스템의 개발 · 제작에 필요한 기술을 지원하고, 전자통신연구소는 공동개발을 주관하는 한편 참여업체에 기술 지원을 하고, 참여업체는 그들의 기술 지원을 받아 상용 시스템을 개발하는 것이었는데, 실질적인 기술 개발의 주체는 누구였나요?
“실질적인 기술 개발의 주체는 기업이었습니다. 그러나 사업 관리라는 면에서 보면 한국이동통신 의 기술진이죠. 한가지 중요한 사항이 있는데, 이러한 시스템은 연구소나 기업체만 가지고는 될 수가 없습니다. 그것을 착각한 거죠.
이동통신 서비스는 사업자가 아니고는 시험 · 평가할 방법이 없습니다. 그래서 연구개발을 할 때 개발자와 시험평가자가 같이 움직이지 않으면 안됩니다. 지금도 모든 평가는 한국이동통신의 장안동 연구소에서 이뤄지고 있습니다. TDX 때 도 사실은 한국통신이 시험평가를 주관했어요. 모든 공을 연구소에 돌려줬을 뿐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이런 일을 해본 일이 없기 때문에 그런 것을 잘 모릅니다.
그러니까 지금까지 통신 네트워크를 담당한 사람들이 너무 어수룩했어요. 자기 가치를 몰랐죠. 한국통신이 훌륭한 기술을 가지고 있는데도 마치 기술이 없다고 착각을 하고 있어요. 예를 들면, 보잉기를 만드는 기술도 중요하지만 그것을 갖다가 서비스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기술입니까.”
—— 어떤 분이 CDMA 개발을 놓고 얘기하길, 씨앗을 만든 것이 퀄컴이라면 그것을 발아시킨 것은 전자통신연구소이며, 다시 그것을 묘목으로 키운 사람이 서단장이라고 하던데, 그 비유가 대충 맞는 겁니까?
“저는 묘목으로 키우기 전에 병충해를 막아주 고 수종을 결정한다든가 어떤 모양의 나무로 가꿔준 거죠. 이를테면 비행기를 주문해서 어떤 노선의 어떤 서비스를 어떤 방법으로 운영케 만들 어준 거죠. 그리고 자기집 앞마당에 심었건 모판에 심었건 씨앗을 심은 것은 기업입니다. TDX 때는 씨앗과 모판 노릇을 연구소가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가 직접 연구소를 관리했던 겁니다. 그러나 CDMA의 경우는 전혀 다릅니다. 시대도 변했고···”
—— 처음에는 외국에서 그 기술을 사오긴 했지만, 그 기술을 갈고 닦아서 세계에서 처음으로 CDMA라는 첨단 이동통신 기술을 실용화하는데 성공했는데, 그 과정에서 일등 공신을 꼽으라면 누구를 꼽겠습니까? 물론 서사장님 자신은 제외 하고 말입니다.
“물론 개발 참여 기업들입니다. 기업의 연구소, 마케팅, 시설이 다 동원됐어요. 그들은 자기네 사장님의 말만큼 제 말도 들어줬어요.”
——서사장님이 사업관리단을 맡은 후로는 참 업체가 적극적으로 뛰기 시작했던 겁니까?
'네. 다들 잘해 주더군요 제가 보통으로 드라이브하는 성격이 아니잖습니까. 밤 2시고 3시고 다 모여 들었어요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시간을 속이는 방법은 없잖아요”
—— 그러니까 기술도입국인 우리나라가 기술 제공국보다 먼저 상용화에 성공할 수 있는 원동력은 바로 그거군요. 남들은 8시간, 10시간 일할 때 우리는 밤잠을 안자고 24시간 노력하는 그런 체제로 뛰었기 때문이라 하겠죠?
“세상에 절대 공짜는 없는 겁니다. 전 기적을 믿지 않습니다. 그리고 성공이란 말을 안씁니다. 연구개발의 끝은 언제인가 하면 그 시스템을 다 쓰고 난 다음에 버리는 날입니다. 그때까지는 오늘보다 내일이 더 낫게 개선해 나가야 하죠.”
—— 단말기의 국산화는 어느 정도나 되어 있습니까?
“이제 시제품이 나와서 양산단계에 들어갔는데, 칩은 외국에 의존하고 있을 겁니다. 기업의 비밀이라 정확히 알기는 어렵지만, 지금쯤 자기네 칩을 만들어 낼 겁니다.
여기서 전자통신연구소의 공로로 크게 칭찬할 게 하나 있는데, 연구소의 반도체연구단에서 개발한 에이식(ASIC) 칩이 큰 역할을 했어요. 그 칩이 국산 단말기에 쓰이진 않았지만, 그것이 개발됨으로 해서 미제의 가격을 내리고 일을 빨리 촉진시키는데 크게 도움이 됐죠.”
——4월 1일부터 CDMA 방식을 공급하기 시작한 신세기통신의 경우 단말기가 부족해 쩔쩔 매고 있다고 하던데, 한국이동통신의 경우 단말기 공급에 차질이 없겠습니까?
“저희도 어려움이 있죠. 그러나 금년 후반기부터는 상당히 호전될 겁니다.”
——벌써 삼성전자가 CDMA 방식의 이동통신 시스템 및 단말기 수출계약을 맺었던데, 앞으로의 수출 전망은 어떻게 보십니까?
“무한한 가능성이 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기술만 가지고 수출이 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 나라의 차관정책에 달려 있죠. 우리나라의 기술을 필요로 하는 나라는 재정에도 어려움이 있기 때문에 다른 경쟁국보다 유리한 조건을 제시해 주는 차관을 제공해 줘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그 동안 서사장님은 국방과학연구소장으로 부터 시작해서 한국통신 TDX사업단장 · 부사장, 과기처차관, KIST 원장 등의 요직을 거쳐 한국이동통신 사장 자리를 맡고 있는데, 앞으로 하나 더 해보고 싶은 연구개발사업이 있다면 뭘까요?
“꼭 어떤 과제를 맡아 하겠다는 생각보다는 국가가 시키는 일은 뭐든지 하겠다는 생각입니다. 그게 인생을 가장 행복하게 만들거든요. 또한 가치가 있죠. 선진국에 가보면 70〜80O대 선배들 이 정치 · 경제 · 학술 등 모든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는데 우리는 50만 먹으면 조로증에 걸리지 않습니까. 의술의 발달로 인간의 수명은 점점 길어지고 있는데, 나머지 인생을 국가가 어떻게 관리해야 할지 걱정되지요. 경험도 중요한 자산 아닙니까.
아무튼 지금까지 쌓아 놓은 업적의 연장에서 어떤 일이 주어진다면 기꺼이 받아들일 생각입니다. 앞으로의 통신은 종합통신망으로 발전할 것이므로 그런 분야에서 제가 기여할 일이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저는 개발사업관리단을 맡아 얻은 게 뭐냐 하면 주체적 사고를 하는 기술자를 키웠다는 점입 니다. 그래서 기존의 연구소에 있는 분들에게 부탁하고 싶은 말씀은 현실에 안주하지 말고 과감하게 산업체로 가라는 겁니다. 이제 그럴 때가 된 거죠. 내가 할 일이 분명치 않다, 내게 설 땅이 없다고 느낄 때는 과감하게 더 발전을 해야죠. 세상은 변하며 나만을 위해 있지는 않다는 얘기죠. 석양의 해는 지게 되어 있으니까 등성이를 넘어야 또 태양을 볼 수 있는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