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우리 나라를 열으신 이가 단군이 아닌가 그러나 지금의 우리들이 단군 시대를 우러러 생각할 때, 너무 멀고 아득하기 때문에 반신반의하는 것이 구약성경의 창세기를 읽는 것과 다름이 없으니 아, 우리 단군 시대가 과연 너무나 오래되고 불가사의한 시대이겠는가. 당시에 건축한 평양성 • 三郎城의 옛 터를 살펴보면 그 공예가 발달하였음을 알 수 있고, 이웃 나라 역사책에서 칭찬한 단군弓 숙신弯에 관한 글을 읽어보면 그들의 전투 장비가 정교하고 아름다움을 알 수 있다. 또한 영토가 북으로는 흑룡강, 남으로 조령, 동으로 大海, 서쪽으로 요동이라 한즉 그들의 문화와 武功이 아주 강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후대에 역사를 편찬한 자들이 그 유적을 다룰 때 너무 득하여 고증할 수 없다고 탄식하였음은 무슨 까닭인가. 아, 내가 우 리나라 역사를 읽다가 고구려가 멸망한 때에 이르러서는 우리 역사의 일대 액운을 슬퍼하였다.
단군이 나라를 세운 지 2천여 년에 왕조가 두 갈래로 나누어졌으니, 하나는 東扶餘요 다른 하나는 北부여이니, 북부여가 곧 고구려다. 동부여가 미약하여 그 영토와 문물을 모두 들어 고구려에 투항하였다. 단군이 즉위한 해부터 고구려 말년까지 햇수가 3천년에 가까우나 단군이 고구려 왕조의 직계 혈통의 조상인 까닭에 고구려의 남은 글과 역사에 단군에 관한 사실들이 상세하게 실려 있었을 것이다. 아니 단군의 사실 뿐만 아니라 그 이전의 먼 역사까지도 실려 있었을 것이다. …”
단재 신채호는「독사신론」에서 이렇게 지적하고, 단군조선 시대를 實史로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
“무릇 단군 시대는 추장정치 시대다. … 聖人이 일어나 높은 공덕으로서 많은 소국들을 통일하여 복속시키니 처음 일어났던 지역은 長白山 아래이고 정치의 중심지역은 卒本부여다. … 단군이 정복하며 토대를 닦은 곳이 최초는 藩陽(길림성)이고 다음이 요동(봉천), 그 다음이 조선본부다. 무공을 떨치고 文德이 넘쳐 사방의 오랑캐들이 다투어 복속하여 오고 … 태자 부루가 그 덕을 보좌하고 어진 신하 彭吳가 그 치적을 더욱 힘써서 인민들에게 농시를 가르치고 배와 수레를 만들어 교통을 발달시켰다. 단군이 팽오에게 명하여 국내의 산천에 제사를 지냈다는 것이 옛 역사에 전하고 있는데도 근대의 역사가들이 말하기를 팽오는 한나라 武帝의 신하로 조선에 온 자이니 어찌 단군 시대에 이 사람이 있겠는가 하여 팽오를 없애 버렸으니 아, 그 오활하고 고루함이 이에 이르겠는가. 만일 한무제의 신하 팽오 때문에 단군의 신하 팽오가 없다고 한다면 한나라 趙襄의 아들 無恤로 말미암아 고구려의 태자 무휼을 없다고 하겠는가?…”(필자 요약)
신채호가 독사신론을 발표한 것은 1908년, 그의 나이 29세 때이다. 대한매일신보에 연재한 이 사론은 단군 • 부여왕조 • 고구려를 정통으로 신라 • 백제 • 일본과의 관계, 발해 등 우리나라 역사를 서술하고 있다.
신채호는 우리나라 인종을 6종류로 나누었다. 선비족 • 부여족 • 지나족 • 말갈족 • 여진족 • 토족으로 분류한 것이다. 그러나 이는 역사상 접촉하고 정복 • 회유하여 단일 문화권으로 흡수된 여러 종족을 지칭하였을 뿐이다. 민족의 정통은 부여족으로 4천년 역사의 주인이라고 신채호는 말하고 있다.
독사신론에서 신채호는 우리 민족의 발상과 발전 과정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부여족의 시조는 장백산의 고원에서 일어나 압록강 줄기로 내려와서 부근의 넓은 지역에 홀어져 살았는데 강의 서쪽은 요동이요 강의 동쪽은 조선이다. 사 람들이 처음 살았던 때의 문명은 압록강 유역에서 일어났다. 자손들이 점차 번성하여 한 갈래는 요동 밑 만주의 각 지역에 분포하고, 한 갈래는 조선과 삼한의 각 지역에 분포하여 각기 그 종족을 모아 다른 토착의 야만 종족들을 정복하고 흡수하니 이것이 우리 민족 발달의 제1기이다.
그 후에 많은 야만 종족이 모두 부여족의 세력 밑에 항복하여 혹은 멸망되기도 하고 혹은 동화 되기도 하였다. 부여족이 왕성해져 그 내부에 경쟁이 일어나 심국이 분립하여 치열하게 다투니 이것이 민족 발달의 제2기이다.
이에 북쪽에 있었던 민족은 안으로 동족의 침입을 받으며 밖으로 여러 민족의 핍박을 받으니 腹背로 적을 만난 고통을 이기지 못해 고구려가 먼저 망하고 뒤에 발해가 망하였다. 안으로 이미 경쟁이 없어지고 밖으로 이민족의 침입이 줄어들어 사납고 날랜 자가 이 기회를 틈타 여러 강자들을 없애고 왕위를 차지하니 고려 이후의 역사를 읽어보면 이같다. 이것이 침체를 자초한 우리나라 제3기이다.
신채호는 민족의 형성 과정을 이렇게 서술하고 한반도로의 진출을 살기 좋고 물산이 풍부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것으로 보고 있다.
신채호는 삼국 중 백제와 일본의 관계를 독특한 시각으로 분석하고 있다.
신라가 발흥하던 시대 동해 바깥에 사나운 종족이 나타났으니 그게 일본이라는 것이다.
일본이 신라를 해마다 왜구를 보내 괴롭혔으나 백제와는 우호관계를 보였는데, 이는 그 인종이 백제인들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신채호는 일본의 대가이정복설, 이른바 임나일본부설은 강력히 부인하고 있다.
독사신론은 신채호가 조국을 떠나기 전에 정리한 우리나라의 역사로 그의 사관은 물론 그때까지 조선 지식인들이 이해했던 우리의 역사를 알게 해준다.
신채호는 일본이 조선을 완전히 침탈하기 직전 조국을 떠난다.
“민족이 살고 죽기는 역사 그것에 달려 있다.” 이렇게 다짐한 신채호는 잃어버린 역사를 찾기 위해 만주의 고토를 찾아 나선 것이다.
“아아, 20년 이전의 조선에는 중국의 역사를 아는 조선 사람은 많아도 조선 역사를 아는 조선 사람이 적었고, 20년 이후의 조선에는 서양 역사를 아는 사람은 많으나 조선의 역사를 아는 조선 사람은 없으니, 조선이 지금의 조선됨이 그 원인의 하나인 것인가 한다.”
망명 직전 신채호의 개탄이다.
이같은 현상이 신채호의 당시만의 것인가에는 의문이다. 오늘의 현실을 되돌아보아도 우리는 떳떳하게 그렇지 않다고 말할 수 있는 용기가 나지 않기 때문이다.
안정복의「동사강목」을 품에 안고 강화도 마니산을 우러러보며 조국을 떠난 신채호는 파란만장의 역경을 지나면서도 역사로 나라를 찾아야 한다는 일념에는 조금의 주저도 보이지 않는다.
중국 산동반도 青島에 도착한 신채호는 동지들을 만나 독립운동의 방략을 논의하는 한편 역사 연구에 골몰한다.
신채호는 영어학습에서도 남다른 열의를 보였다. 김규식 • 이광수에게 영어를 배우고 자습으로 「로마흥망사」라일의「영웅숭배론」등을 독파했다 .「로마흥망사」의 원서강독은 그의 서양사에 대한 관심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1914년 그가 35세 되던 해 만주 봉천의 東吕 학교에 있을 때 교재로「조선사」를 집필, 강의했다고 하나 전하지 않아 아쉬움을 남긴다
이때 신채호는 윤세복 • 신백우 • 김사 • 이길용 등과 백두산에 올라 한국 고대사의 地境을 확인하고 광개토왕비를 답사한다. 남북만주 일대의 고조선 • 고구려 • 발해의 옛 땅을 밟고 광개토왕비를 어루만지며 뜨거운 눈물을 뿌렸던 신채호는 북경으로 가서 도서관의 각종 자료를 섭렵하며 「조선사」집필을 계속한다.
독립운동과 역사 연구에 골목하던 그는 49세 때인 1928년 대만 기륭항에서 일경에 피체된다.
조선일보는 申榮雨로 하여금 여순감옥에 수감 되어 있는 신채호를 만나도록 하여 그 의 「조선사」를 입수하려 노력한다.
안재홍의 노력으로 신채호의「조선사」와 「조선 상고문화사」는 1931년 10월부터 1932년 5월 31일까지 조선일보에 연재되어 그의 역사 연구가 민중들에게 알려지게 된다.
신채호는 일제가 회유, 친일인사의 보증만 있으면 가출옥시켜 주겠다는 제의를 받지만 단호히 거절한다. 그러나 옥중에 있으면서도 그는 역사 연구에 대한 의욕을 버리지 않고 파괴된 이 나라의 역사를 복원하려 심혈을 기울인다.
이같은 시실은 신채호가 홍벽초에게 보낸 유서 같은 편지가 입증한다.
신채호는 이 편지에서「大伽邮遷國考」,「鄭仁弘公略傳」, 「李朝党争史」는 자신이 아니고는 쓸 사람이 없다고 호언한다.
그러나 신채호는 이같은 편지를 보낸 다음 해 1936년 57세로 여순감옥에서 순국하니 그의 역사 서술은 계획에도 이르지 못하고 그치고 만다.
그러나 단재는 역사를 소재로 한 많은 작품과 논설을 남겼다.
번역서인「이태리건국 삼걸전」을 비롯 국한문 의 「을지문덕」, 궁예를 새로운 시각에서 본 「ᅳ目大王」, 연개소문의 유년 시절을 그린 「갓쉰동전」, 홍경래의 난을 소재로 한 「ᅳ耳憎」등 많은 작품을 남겼다.
신채호의 조선사는「조선사 총론」, 「문화편」, 「사상변천편」,「강역고」, 「인물고」의 5편으로 기획되었으며, 이 원고들은 李允宰가 확인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그러나 활자화된 것은 이들 모든 내용이 아니라 부분부분이라 아쉬움을 남긴다.
조선일보에 연재됐던「조선상고문화사」는 제1편 단군시대, 제2편 단군조의 업적과 공덕, 제3 편 아사달왕조 시대와 단군 이후의 분열과 식민지의 성쇠, 제4편 辰韓의 전성기와 대외전쟁, 제5편 조선 열국 분쟁의 초기까지로 미완이었다.
“국민의 애국심은 역사에서 우러난다. 역사를 제대로 읽히면 애국의 길이 저절로 열리게 마련이다. 國魂을 진작해 나가는 기저인 역사를 알려 면 어려서부터 읽게 하며, 위 아래 계층의 구별 없이 누구나 다 읽어야 국민이 제 구실을 할 수 있다. 영국의 크기와 미국의 풍요 독일의 용맹과 프랑스의 굳건함은 단지 한편의 역사가 낳은 산물에 지나지 않는다. 역사를 모르면 나라를 유지할 수조차 없다.”
이같이 지적했던 신채호는 “역사를 알지 못했거나 알았다 해도 잘못 알았기 때문에 나라가 패망하였다.”고 개탄하며, 그의 일생을 독립운동과 역사 복원에 바쳤던 것이다.
오늘을 사는 우리는 과연 단재 신채호 선생에게 무슨 말을 할 수 있을 것인가? 단재가 복원해 놓은 역사마저도 非과학 또한 실중사학이 아니라고 버림을 받고 있는 현실이니 할 말을 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