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자가용시대인지라 차(車) 없는 가정이 드물지만, 또한 차(茶) 없는 가정은 너무나 많은 것 같다. 현대생활과 현대인의 필요성에 있어 마시는 차가. 타고 다니는 차에 비해 그 우선순위가 훨씬 낮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승용차는 없이 살아도 밥을 먹지 않고 살 수는 없다. 제 아무리 과학문명이 발달한다고 해도 음식 없이는 살 수가 없는 것이 아니겠는가.
음식에 있어 밥은 먹는 것이요, 술이나 차나 국물 따위는 마시는 것이다. 먹는 것보다도 마시는 것을 앞에 내세워 ‘음식’이라고 일컬은 것은 만물의 기원이 물에 있고 어느 생명체라도 수분이 없이는 생명의 유지를 못하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흔하다는 의미로 쓰이는 말이기는 하지만, ‘茶飯事’라는 말에서도 먹는 밥보다 마시는 차가 앞에 놓임은 음식에서처럼 마시는 차의 중요성을 강조함이다.
이렇게 생각해 본다면. 승용 차를 팔아서라도 차가 없는 가정에서는 녹차든 황차든 홍차든 차를 한 통 구비해 놓을 일이라 생각된다.
조상에게 지내는 명절 제사를 ‘차례’라고 하는데. 茶禮는 차를 올리는 제례라는 뜻이다. 또한 佛前에 놓인 그릇을 茶器라고 하는데, 이는 차를 올리는 그릇이라는 뜻이다.
차라는 것이 훌륭하고 신령한 음료이기에 사람이나 귀신이나 부처가 다 즐기고 사랑하는 기호음료가 된 것이다.
이 세상에서 인류가 발명한 기호음료 가운데서 위대한 것이 두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차요 다른 하나는 술이다.
술과 차, 차와 술을 두고 어느 것이 더 위대하냐고 따진다면, 그 결론은 둘 다 위대한 기호음료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술은 감정에 번지는 음료이고 차는 정신세계에 와닿는 음료이다. 술은 지상적인 음료이고, 차는 천상적인 음료이며, 술은 멋으로 통하고, 차는 道의 세계로 통하는 음료이다.
갈수록 다양해져 가는 공해식품과, 더욱 심각해진 환경공해와 문명공해 속에서 살고 있는 현대의 우리들에게 몸과 마음을 건강 하고 청정하게 하며, 삶을 윤택 하고 운치있게 만들어. 나아가 인격을 고양시키고 저 성스러운 도의 세계로까지 인도해 주는 위대한 음료인 차가 있다는 것은 큰 축복이 아닐 수 없다..
차의 기원
차는 그 기원에서 부터 藥과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다.
실로 아득한 전설이기는 해도, 차의 기원은 5천년 가까이 거슬러 올라간다. 5천년이라면 반만 년 우리 민족의 역사와 함께 하는 것이다.
당나라 육우(727〜803년)가 지은 세계 최고의 차책인「茶經」을 읽어 보면 다음과 같은 글이 들어 있다.
“신농식경 다명구복 영인유력 열지(神農食經 茶茗久服 令人有力悅志)”
이를 풀이해 보면, 신농이 쓴「식경」에서 말하기를, 차를 오랫동안 마시면 몸에는 힘이 솟고, 마음에는 기쁨이 돋는다고 했다는 뜻이다.
신농은 고대 중국의 삼황 가운데 한 사람으로 불(火)의 덕으로 제왕이 됐다는 뜻에서 炎帝라고 했으며. 모든 백성들에게 농사를 가르쳤다고 해서 신농이라고 일컬었다 한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신농은 약초를 발견하기 위해 백 가지의 풀을 뜯어 그 맛과 효능을 시험하다가 독성이 있는 풀을 뜯어 먹고 중독이 되었는데, 그 때 마침 차나무잎을 뜯어 먹고는 독을 풀게 되었다고 한다.
사마천(BC 145〜86년)의 「사기」에도 신농에 관한 기사가 들어 있는데, 신농이 붉은 채찍을 들고 다니면서 백 가지 풀을 맛보아서 비로소 의약을 발명해내었다는 것이 그 내용이다.
그런 점으로 미루어서 신농은 최초로 차나무를 발견하고 차의 약리적인 효능을 알아낸 사람이다.
신농을 두고 전설적인 인물로만 생각해 왔지만, 역사학자에 따라서는 신농시대를 BC 3218〜3078년경으로 설정을 하기도 한다. 고고학적인 증거나 문헌적인 전거가 없는 설에 불과하지만, 신농을 우리 동이족으로 보는 사학자도 더러 있다.
BC 2200년경에 지었다는 중국 고대 지리서인「산해경」에 보면, 우리 동이족의 옛나라인 숙신국에 불함산이라는 산이 있고, 그 산에서 삼황오제의 여덟 임금이 약초를 꺾어 갔었다는 내용이 들어 있다.
그런 내용들이 고고학적인 연구의 발달로 사실로 드러난다면 우리 동이족의 차의 기원은 단군시대까지로 거슬러 올라가게 된다.

신라의 화랑들이 차를 끓이며 풍류를 즐겼다는 녹두정
우리 나라 차의 역사
우리 나라 차의 역사는 까마득한 단군시대까지로 거슬러 올라가고 있지만, 기록이 없던 시대의 일들이라 어쩔 수 없이 기록에 나타난 것만을 대략 살펴 보겠다.
고대사에 관한 기록으로 유일하게 정사로 인정받는「삼국사기」에 의하면, “차는 선덕여왕 (재위 632〜647년) 때부터 있었다.”는 기록으로 미루어서 7세 기초부터 우리나라에 음다 풍습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흥덕왕 3년(828년)에는 대렴이 당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오면서 차 종자를 가져 왔는데 이 것을 흥덕왕의 명으로 지리산에 심게 해서, 이때에 이르러 차가 번성했다.”는 것이다.
일연이 지은「삼국유사」의 ‘가락국기’에는 “신라 30대 법민왕(재위 661〜681년)이 조서를 내려, 자기는 가락국수로왕의 15 대손으로 자기 조상들의 사당에 계속해 종묘와 함께 제사를 지내게 하였는데, 그래서 수로왕의 17대손이 되는 갱세급간이 술 · 식혜 · 떡 · 밥 · 차(茶)· 과일 등 제물을 갖추어 거등왕(재위 199〜253년) 시절처럼 제사를 잘 올렸다.”는 내용이 적힌 걸로 보아 가락국의 제례에는 일찍이 차가 등장한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이능화의 r조선불교통사」에는 가락국의 차 유래가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김해의 백월산에는 竹露茶 가 있다. 세상에 전하기를 수로왕비인 허씨가 인도에서 가져온 차씨라고 한다.”
수로왕비가 된 허황옥 공주가 멀리 인도 아유타국에서 혼수로 가져온 차씨가 번성해 김해 백월산 죽로차가 되었다는 설화인데. 땅 속에서 잠자다가 속속 드러나는 가야사와 함께 이것이 사실로 밝혀진다면 신라차에 비해 8백여년을 앞서는 일이다.
어쨌거나 우리나라에는 7세기를 전후해 소수의 지배계층에 차를 마시는 풍습이 있었음은 사실인 것 같다.
차와 차나무
차는 두 가지 뜻을 담고 있는데, 하나는 차나무잎을 따서 그것을 재료로 법도대로 덖으고, 비비고, 말리고 하여 완성해 놓은 제품으로서의 차를 말하고, 또 하나는 완성된 제품인 차를 가지고 물에다 끓이거나 뜨거운 물에다 울궈 낸 음료인 차를 말한다.
지금은 여러 대용차(감잎 차 · 두충차 등)들이 많이 생산되어 마시고 있는데. 그것 들은 다산선생이 말한 것처럼 인삼탕 · 구기자탕 등으로 불러야 마땅하고, 진정한 뜻에 서의 차란 차나무잎만을 따서 만들어진 제품에 한정된다고 하겠다.
아열대성 상록 관목인 차나무는 동백나무과 차나무속이다. 그러나 학자에 따라서는 동백나무과 동백속으로 보기도 하고 또는 차나무과 차나무속으로 보기도 하는데, 우리 나라에서 옛날에 동백을 山茶로 불렀듯이 차나무는 동백나무의 사촌이나 친척쯤 되는 나무라고 하겠다.
차나무는 중생대 말기에서 신생대 초기에 생겨난 식물로, 식물학적인 기원은 대략 6〜7 천만년 전으로 추정하고 있다.
차의 발생지가 중국이라는 학설에 대해서는 별 이론이 없는데, 우리 한반도에는 빙하기 동안에 유입되어 자생해 온 것으로 추측하기도 한다.
차나무는 인도 대엽종과 소엽종, 중국 대엽종과 소엽종 등 크게 4종으로 나누는 데, 우리 나라에서 자라고 있는 차나무들은 중국 소엽종에 속하는 것들이다.
우리 나라의 차나무는 경남 및 전남북과 제주도에서 야생 하거나 재배되고 있는데, 연 평균 기온이 13℃ 이상이어야 좋고, 강우량은 1,300 〜1,500 mm가 적당하며. 사질 양토에서 특히 잘 자란다.
차나무는 관상수로서도 제 일급에 속하는 나무이다. 동백잎처럼 늘 짙푸른 잎 속에서 금빛 꽃술이 담긴 하얀 꽃 송이가 피어날 때면 그 황홀 하고 고결한 모습에 그만 넋을 잃고 만다.
차꽃은 늦가을부터 초겨울에 걸쳐 피어나는데, 素花 또는 冬白花라고 불리우기도 한다. 그러니까9〜11월이 차꽃 시절이다.
강산이 두번이나 변해버린 옛날에 필자와「정보와 통신」 (체신)지와 함께 했던 그 시 절 인연이 지금 차꽃 피는 시 절에 도래하여 정보통신 가족 들과 차 이야기를 나누게 됨을 기쁘고 고맙게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