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일반적으로 한국화를 이해함에 있어 산과 강 그리고 풍경화가 그려져 있으면 이를 ‘산수화’라고 이름한다. 그리고 이러한 산수화를 분류함에 있어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 분류하는데, 그것은 실경 또는 진경산수화와 사경산수화 그리고 관념산수화로 나누는 것이다. 진경산수화는 실제 현장에서 보고 그리거나 사생을 하여 그리는 방법으로서 현실에 존재하는 상황을 그대로 그려내는 것이다. 사경산수화는 진경과 비슷한데 어디선가 있을 것 같은 상황을 연출하여 그려내는 것이며, 관념산수화는 말 그대로 진경이 아닌 관념적 상황을 그려내는 것이다.
동양에서 이러한 산수화의 출현을 학술적으로 정확하게 단정 지을 수는 없지만 중국의 六朝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 한다. 그러나 이에 대하여 확실한 근거는 없다. 그리고 이러한 산수화의 시작은 사진이 없었던 때와 마찬가지로 산수 풍경을 그대로 묘사하는 실경에서 출발 하였다는 것이 학계의 통설이다. 그러한 실경 묘사에서 차츰 그 이념들을 바뀌게 하는 도가사상 등 그림 속에 나타나는 내면세계가 담겨져 있는 사상적인 것의 이념적 배경들이 그림의 형식에까지 잠입하여 들면서 관념적 경향을 띠기 시작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한국의 산수화는 중국 산수화의 영향 아래 출발되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산하와 풍토가 중국과는 판이하게 다름에도 불구 하고 중국에서 전하여 내려오는 그림 그리는 방법들을 그대로 묘사하여 그리는 것을 최고라 생각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 표현방법이 우리의 산천을 표현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중국의 풍경을 표현하는 것이었고, 또 그러한 표현방법들이 그대로 오랫동안 전승되어 내려온 것이었다. 그러다가 18세기 겸재의 출현에 의하여 한국의 산수화 표현에 있어 한국 산하를 그대로 표현해 내는 ‘진경산수화’라는 급진적인 표현을 보게 되는 것이다.
謙齋 鄭敵은 기록상으로 1676년 숙종 2년에 태어나 1759년 영조 35년에 죽어 84살이나 살다가 간 사람이다. 光山 鄭씨로서 字는 元伯이며 호는 謙齋를 많이 썼다. 때로는 諫老 · 蘭谷 등의 별호를 쓰기도 하였다. 겸재는 화원인데도 양반가계 출신이었다. 그러므로 양반 가계 출신인 겸재는 중인 계급 이하가 나가는 직업인 화원의 길은 선뜻 나서기 어려웠을 것이었겠 지만 당시 어려웠던 생활고와 자신의 재주를 함양시키기 위하여 화원이 되었다. 그러다가 훗날 겸재는 화원으로서 陽川絲監을 비롯하여 여러 고을의 벼슬을 거쳤을 뿐만 아니라 영조 30년(1754년)에는 종4품의 벼슬까지 지내게 되었다. 이는 비록 천인계급인 화원으로 출발하였으나 원래 양반 출신이었고 영조와의 가계적인 친분 관계에서 이와 같은 벼슬에 오르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던 것이다.
겸재 하면 우선 떠오르는 것이한국의 실경 풍경화를 묘사 하여 놓은 독특한 화풍의 정착과 완성에 이바지한 점이다. 그 당시까지만 하여도 조선 화단은 중국에서 전해져 내려오는 畵譜나 畵風을 그대로 옮기는 수업을 하거나 그들의 그림들을 비판 없이 모사하는 풍토가 이루어져 있었으며, 오늘날과 같이 새로운 감각의 화풍 파급에도 둔감했고 또 그러한 경향에 어두운 실정이었다. 그러한 주변적 배경 속에서도 겸재의 진경 산수화가 나타났다는 것은 분명 커다란 변화였던 것이다.
겸재는 다른 실경 그림 분야에서도 뛰어났지만 특히 금강산 그림과 인왕산 그림이 유명하다. 금강산 그림을 많은 사람이 그려 왔으나 유독 겸재의 금강산 그림이 유명한 것은 그만큼 많은 금강산 그림을 그렸다는 것이며 금강산 그림에 일가견을 이루었다는 것이다. 사실 금강산 그림은 조선국초 이래로 왕명에 의하거나 왕에게 진헌하기 위하여 화원을 보내서 금강산 그림을 그려오게 하는 일이 자주 있었는데 여기서 금강산 그림에 대한 왕실 취향성을 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이러한 경향들이 금강산 그림의 정형을 형 성하였던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한 가운데 겸재를 역대 금강산을 그렸던 작가 중 가장 뛰어난 작가라고 평가하는 것은 그가 그린 금강산 그림에서 볼 수 있듯이 공중에서 아래로 내려다 보고 그려내는 俯瞰法에의해 금강산 전체 경치를 한 폭의 그림 속에 압축해서 넣는 구성 솜씨가 일품이며, 그 속에는 겸재다운 역량의 경지가 잘 표현되어 있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이러한 금강산 그림의 표현법이 겸재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정립되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인왕산 그림은 겸재가 그린 만년기의 원숙한 작품들에서 많이 나타나는데, 거의가 인왕산의 동쪽 기슭을 둘러싼 풍경이 거나 서울 근교에서 볼 수 있는 경관들이다. 이러한 그림들에서는 특히 인왕산 바위들이 지니고 있는 중량감이 잘 표현되어 나타나고 있는데, 이와 같은 인왕산 그림들은 실제 사생을 통하여 그려낸 진경산수의 참모습과 그 특색들이 잘 나타난 작품들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겸재의 진경산수화가 금강산 그림 이나 인왕산을 묘사한 것에서도 많이 볼 수 있지만 그가 그린 관동팔경 또는 서울 근교의 실경 속에서도 잘 드러남을 볼 수 있다. 겸재 정선의 이와 같은 실경 묘사는 훗날 그의 문하로 알려진 심사정에게 이어졌고 단원 김홍도에 이르러 그 열매를 맺었다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겸재는 우리 미술 사에서 선구적으로 한국 경치를 실감나게 표현해 내어 진경산수 화를 정립하였을 뿐만 아니라 자기의 독자적 표현양식을 완성한 사람이라 할 수 있다. 곧 겸재의 진경산수화가 지니는 가장 큰 의미는 한국적 산수화의 정립에 있어 가장 앞선 사람으로서 그 기초를 닦았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겸재가 자기 방식의 산수화를 정립하는데 있어 중국의 화풍을 전혀 모방 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초기에는 모작이 많이 있다. 겸재는 이와 같이 초기에는 중국 그림의 모작을 통하여 다양 한 중국 그림들의 준법과 중요 화법을 익혔으나, 나중에는 오히려 한국 산하의 진경화 표현에 대한 모색과 수련 끝에 한국 적 진경산수화라는 장르를 개척한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또 하나의 관계성을 설정할 수 있는데, 겸재의 진경산수화가 탄생하게 된 이면에는 본인의 의지도 중요하 지만 진경산수화가 나오게 된 사회적 분위기도 심상치 않게 언급되고 있는 것이 학계의 논의 부분이다. 이는 진경산수화가 나오게 된 배경에는 단지 겸재 개인에게만 일어난 현실 변화라기보다는 당시 지식사회의 사회적 변화와 함께 호흡하는 생태적인 변화라는 것이다. 즉, 숙종 말기로부터 영조조에 걸쳐 일어난 한글로 된 서민문학의 대두, 서민사회를 그려낸 풍속 화의 발달, 실학파에 의한 자연 과학기술의 발달 등 사회 전분 야의 새로운 흐름은 다름 아닌 근대사회를 향한 바쁜 발걸음이었고, 그 속에 겸재 그림도 같이 호흡하며 변화되었다는 것이다.
어쨌든 겸재 이후 계속 이어져야 할 한국 진경산수화의 맥은 끊어져 버렸다. 그것은 또다시 중국 문화를 우위에 두고 따르는 조선조의 사회적 배경에 의함인데, 그 당시 그러한 화풍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사회적 기반이 공고히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쉽게도 정착이 가능하였던 진경산수화법이 체계적으로 뒤이어지지 못한 것은 우리 미술사의 흐름에 있어 크나큰 실책이었다. 여기서 우리는 한 시대의 역량 있는 작가와 미술문화를 탄생시키기 위하여 사회적 배경이 얼마나 큰 역할을 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오늘날에도 겸재 정선의 대를 이어 한국적 진경의 풍경 묘사에 많은 작가들이 힘쓰고 있으나 큰 줄기의 방향성을 잡지 못 하고 있는 것도 겸재 이래로 계속 이어지지 못한 진경산수화의 단절 때문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이상과 같이 조선시대 화가 중 우리 산하를 있는 그대로 진솔하게 진경으로 표현한 겸재 정선에 대하여 알아보았다. 무엇보다도 우리 것을 부르짖는 오늘날 많은 시사점이 있음을 보여준다. 한 작가가 이룬 역량의 결정체가 결국 개인의 영욕이 아니라, 그 시대 사회의 배경 속에서 이루어지는데 시대적 성과와 결부되어 나타남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시대 이 땅에서는 어떠한 배경 아래 역량 있는 작가의 탄생이 이루어지는가? ’ 하는 것은 이 시대를 엮어 가는 우리 모두가 이루어 낸 오늘의 사회적 배경임을 잊어서는 안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