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 「문학의 해 한국 현대문학 100년 (2) -1920년대

동인지시대로 불길은 댕겨지고


3 • 1운동: 근대문학 발전의 도화선

1920년대는 정치 • 사회적으로 보면 앞 시대의 개화 준비운동기간에서 독립 전취에 우리 겨레의 관심이 집중된 기간이었다. 이는 그 직전인 1919년에 일어난 3 • 1 독립 운동에서 구체적으로 점화되었다. 우리 겨레의 최대의 항쟁으로 기록되는 3 • 1운동은 역사적으로 하나의 큰 획을 그은 것이 었듯, 문학적으로도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비록 현실적으로는 소기의 결실을 맺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이 땅에 커다란 정치적 • 문화적 전기를 마련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적어도 일제에 경각심과 반성을 촉구하는 실마리로 작용했다는 점에서 그 의미는 자못 크기만 하다.

이번의 조선 민중 봉기는 일본의 對韓政策의 실패를 뜻한다. 현대의 식민정책은 옛날과 달라 武斷으로써 시종될 것이 아니라 교화를 주안으로 한 문화정책으로써 달성되어야 한다. 강압적인 방법은 가장 졸렬한 수단이다. 이번의 조선 민중 봉기는 가혹한 무단정치에 대한 조선 민중의 필연적인 항거다.

이러한 항거의 유발은 조선에 대한 일본의 태도를 오해케 하는 데 도움이 될 뿐이다. 이것을 계기로 일본의 지금까지의 한국에 대한 정책이 반성되고 시급히 시정되어야 할 것이다. — 1919년 7월 27일자「大吸每 日」사설에서


이 사설은 한국에 대한 일본의 정책을 반성하는 당시의 일본 여론을 대변한 것이었다. 이러한 일본 자체내의 여론은 국제 여론에 합류되어 대한정책에 변화를 가져오게 하였다. 3 • 1 운동을 통해 보여준 우리 겨레의 뭉친 힘은, 비록 표면적이고 기만적인 것이기는 해도 일제로 하여금 무단정책에서 문화정책으로 정책적 변화를 꾀하게 만드는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그리하여 일제는 정책 변경의 실천으로서 조선총독을 경질하고 언론 • 집회 • 결사 • 종교의 자유를 어느 정도 인정하는 조치를 취하였다. 이것이 3 • 1 독립운동이 가져다 준 문화적인 승리이며 그 의의였다면, 그로 인한 언론 자유의 완화 조치는 문예지의 속간을 비롯해(「창조」) 월간지의 간행(「서광」•「서 울」•「삼광」), 언론사의 창립(조선일보 • 동아일보), 월간 종합지의 창간 등을 속출하게 하는 발판이 되었다.



김동인의 훼손당한 자존심과 「創造」의 출현

우리 근대문학의 발전은 동인지의 출현으로부터 그 가속력이 붙었다. 그런데 동인지의 첫 출현은 자존심 강했던 한 문학지 망생의 굴욕감 때문이었다는 점에서 다분히 역설적 의미가 담겨 있다. 즉, 우리나라 최초의 동인지로 기록된 「창조」의 탄생은 주요한으로부터 상처받은 자존심을 회복하고 싶은 김동인의 의도가 크게 작용하였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김동인은 그 당시 그의 맞수 라고 생각했던 주요한이 이미 문학적으로 인정을 받고 있는데 비해 자신의 글은 아무 곳에서도 실어주지 않자 자존심이 상한 나머지 스스로 잡지를 내기로 결심한 끝에 그 뜻을 「창조」의 창간으로 실현하고자 했다. 그러니까 그가 내걸었던 ‘조선문학 건설’이라는 사명감보다는 자신의 굴욕감을 씻고 싶은 의도가 더 앞섰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렇게 하여 이 땅의 최초의 문학동인지로 기록된 「창조」는 탄생하였다.

「창조」는 3 • 1운동이 일어나기 한 달 전인 1919년 2월 1일에 창간되었다.「창조」의 창간 주역은 김동인 • 주요한 • 전영택 등이었다. 이들은 여건이 좋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명맥을 이어 가다가 결국 9집을 끝으로 막을 내리고 말았다. 이때 동인지를 부득이 폐간하게 된 이유에 대하여 나중에 김동인은 신 문학의 주춧돌이 어느 정도 놓여졌고, 작품 발표 기관이 많이 생겼으며, 많은 발간비용을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술회한 바 있다. 그에 의하면, 당시 3,000부가 소화되기는 했지만 매상대금은 거의 들어오지 않고 매번 새 비용을 내야 했기 때문에 여간 괴롭지 않았다고 한다. 이를 통해 보면, 출간비용에 대한 부담이 결국 폐간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학동인지의 발간이 우리 근대문학 초기의 발전을 주도하였다는 의의에 대해서는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당시 식민지 체제 아래서 우리말을 표현 매체로 한 작품 활동이 심한 박해를 받고 있던 상황에서 일제로부터 규제나 핍 박받을 것을 뻔히 알면서도 문인들이 우리말로 쓴 작품을 발표할 광장을 마련하기 위해 스스로 동인지를 간행했던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동인지들에는 그 구성원들에게 직접 간접으로 성원을 보냈던 당시 우리 겨레의 소망과 정성과 열의가 알뜰 하게 담겨져 있었다. 또한 발표 지면이 매우 제한되어 있었던 당시의 상황에서 동인지들은 신인들의 팽창하는 발표 욕구를 소화, 수용하는 公器로서의 구실도 톡톡히 해냈다. 그 후 오늘날까지 수없는 동인지들이 명멸하며 우리 문학의 발전에 이 바지하고 있는데, 그 뿌리는 다 「창조」에 닿아 있음을 생각할 때 그 의의가 여간 깊지 않은 것이다.



동인지의 속출과 문예사조의 혼류

「창조」를 불씨로 하는 문학동인지의 창간은 1920년대에 이르러 본격적으로 불길이 타오르기 시작했다.「폐허」 • 「개벽」(1920 년),「장미촌」(1921년),「백조」(1922년), 「금성」(1923년),「조선문단」 • 「폐허이후」 • 「靈臺」 • 「생장」(1924년),「해외문학」. 「문예시대」(1927년),「삼천리」 • 「문예공론」 • 「조선문단」(1929년) 둥둥이 속속 창간되어 문인들의 창작 욕구를 충족하는 한편, 현대문학의 터전을 점차 일구어 나갔다.

그런데 이렇게 봇물처럼 터져 나온 동인지들은 그 성격이 각 양각색이었다. 특히 개화 이후 서구의 여러 문예사조들이 일시에 물밀듯이 들어옴으로써 그것을 제대로 소화하지 못하고 피상적으로 받아들인 결과 개념상의 혼란을 초래하였다. 이를테면 사실주의 • 자연주의, 낭만의 식 • 퇴폐주의, 상징주의 • 낭만주의 등을 혼동하여 그 색채가 불분명해지고 말았던 것이다. 이렇게 된 것은 당시의 젊은 문학도들이 서구의 문예사조를 아무런 비판없이 수용한데다가 문학적 신념도 부족했으며, 여기에 한국적 상황(시간적 후진성, 공간적 미숙성)까지 결부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가운데도 이들의 동인지 운동은 나름대로 우리 문학의 발전에 기여하였다. 이 시기의 특징을 단적으로 요약한다면 순 문예운동에 투신했다는 점이다. 그래서 그들은 1910년대의 특징인 계몽주의에 대한 거부에서 출발하여 口語體를 많이 구사하고 구체적 문예운동을 전개하였으며, 특히 내용보다는 형식을 중요시함으로써 앞 시대에 비해 더 진전된 문학적 인식을 갖게 되었다.



새로운 형식의 실험과 시의 변화

이 시기의 큰 변화는 우선 시 문학에서부터 일어났다. 시인들은 무엇보다 형식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면서 현실에 대한 인식과 함께 그것을 초월하는 문제에 매달렸다. 김소월 • 한용운 • 이상화 등을 당시의 대표적인 시인들로 꼽을 수 있다. 이 들은 다같이 새로운 시 형식의 탐색에 관심을 기울였지만, 방법상으로는 둘로 구분된다. 즉, 김소월이 우리의 고유 형식인 시조에 버금가는 새로운 정형시 (7 • 5조)를 모색하여 민요조를 개척하였다면, 그 반대편에서 정형성을 완전히 해체한 자유시나 산문시를 쓴 한용운과 이상화가 자리를 잡고 있었다.

김소월은 4 • 4조의 창가를 7 • 5조로 변주하여「진달래꽃」 • 「산유화」 • 「조혼」 • 「접동새」등을 창작하였다. 이들 작품에는 전래의 정한의 세계를 새로운 리듬(민요조)으로 표현하려는 의지가 뚜렷하게 나타난다. 이에 비해 한용운과 이상화는 반복적 리듬을 지양하고 자유시를 통해 이미지의 발전이나 언어의 절제에 관심을 기울였다. 그러면서도 이상화는 낭만적 • 이상적 경향을 보인 반면에, 한용운은 소승적 태도를 극복하고 역사와 사회에 대하여 냉철한 인식을 가지려고 노력하였다.



소설의 변화와 개인과 사회의 발견

한편, 소설에서는 우선 식민 지시대의 어두운 세계를 문학적으로 드러내는 데 관심이 모였다. 소설가들은 사회적 보편적 고뇌를 개인적 실존적 고뇌로 치환하려고 함으로써 근대적 예술의식에 한 걸음 더 다가섰다. 그리하여 이광수가 보여주었던 소재나 독자에 대한 추상적 인식을 구체적인 자기 계층으로 국한하는 것으로 바꾸었다. 즉, 염상섭은 자아의 각성에 이르는 부르주아지를, 최서해는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가는 하층민을, 그리고 김동인과 현진건은 자신의 삶에 안주할 수 없는 소시민에 관심을 갖고 그들을 독자로 겨냥하여 작품을 썼다.

염상섭의 작품은 개량주의의 자기 확인이라는 점에 특징이 있다. 그는 유교적 세계관에서 구의 개인의식을 주입하려는 자 연주의(개인주의)사상과, 한 개인의 성장 과정을 탐구하는 사실주의적 관념(객관적 묘사 기법)등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새로운 이념에 대한 탐구, 그것을 불가능하게 하는 상황에 대한 부정적 인식과 비판정신을「표본실의 청개구리」 • 「萬歲前」 • 「삼대」 등을 통하여 그려냈다. 그의 작품은 거의 일관되게 돈과 인간관계, 즉, 욕망을 주제로 담고 있다. 이러한 주제를 그는 서울 중류계급의 사투리를 통하여 그려냄으로써 당대의 현실을 비판적으로 인식하게 했다. 그는 민족주의와 사회주의를 함께 흡수하는 개량주의에 관심을 가졌지만, 이를 작품으로 구체화하지는 못했다.

최서해는 주로 빈민의 고통과 절규를 작품화하였다. 이를 통해 식민지시대의 궁핍화 현상을 부각하려고 했다. 그래서 그의 작품에는 농민과 노동자 등 하층민들이 주요 제재가 되고 있 는데, 이는 그 자신의 만주 체험에 결부되어 있다. 그의 대표 작에는「탈출기」 • 「큰물진 뒤」 • 「朴乭의 죽음」 • 「기아와 살륙」 • 「紅超」  등이 있다. 그가 남긴 성과는 개인적 성향을 민족적인 것으로 확대하여 작품에 보편적 가치를 부여했다는 점이다.

김동인과 현진건은 자신의 한 계내에서 사회 현실을 파악하려고 하여 세계 인식에 있어 피상성을 면치 못했다는 비판을 받 고 있다. 먼저 김동인의 경우에는 사회적 모순에 대한 비판보다는 개인적 행복을 불가능하게 하는 사회에 대한 저주와 증오 심을 작품 속에 투영함으로써 작품이 대체로 이상주의나 개인적 유토피아, 또는 향락적 분위기로 흐르고 있다. 특히 「배따라기」 • 「감자」 • 「김연실전」 • 「광화사」 • 「광염소나타」 등이 그렇다. 그리고 현진건의 경우는 인간이 가정과 그 확대체인 사회에 얽매여 있다고 보아 가정 내부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즐겨 다루었다. 그는 부조리하고 모순된 사회를 인식하고 있었지만, 그 실체를 구체적으로 파악하지는 못했다. 그의 대표작인「술 권하는 사회」 • 「운수 좋은 날」 • 「불」 • 「빈처」 등에 그러한 점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