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정人터뷰
이혜옥 전 우표디자이너

디자인, 사람을 이해하는 예술
이혜옥 디자이너는 ‘디자인은 사람을 이해하는 데에서 시작한다.’라는 신념으로 1981년부터 2000년까지 우표 디자인에만 전념했다.
“전 세계 우표 대부분은 각 국가 정부에서 발행해요. 민간에서 발행하는 사례는 거의 없죠. 쉽게 말해 우표는 한 나라의 상징으로 디자인 과정에서 무엇 하나 허투루 넘겨서는 안 돼요.”
그래서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와 협업을 서슴지 않았고, 역사, 자연, 과학, 사회, 문학, 예술을 넘나들며 쉼 없이 공부했다.


“우표에 너무 많은 내용을 담아내려 하면 보는 이의 흥미를 끌지 못하고, 메시지 전달력도 흐려져요. 커뮤니케이션 측면에서 불필요한 요소는 과감하게 덜어내고, 중요한 메시지는 강조하면서 형태와 색감까지 관찰하고 연구해야 하죠. 그러다 보니 각국의 우표 속에 역사, 문화, 정치, 사회 관련 메시지가 보이더라고요.”
이 모든 과정이 이혜옥 디자이너에게는 자신을 바로 세워가며 차곡차곡 실력을 쌓는 훈련이 됐다. 덕분에 과거와현재가 조화를 이루는 그만의 디자인 세계를 구축할 수있었고, 수많은 수상 경력이 이를 증명해준다.
우표 속 숨겨진 이야기
“88 서울올림픽 기념우표가 기억에 남아요. 당시 올림픽의 의미를 되새기면서 역동적인 이미지를 고민하다가, 그리스 도자기에 그려진 스타디움 경기 이미지를 떠올리고 배경으로 활용했어요. 그 위에 성화 봉송을 손에 쥐고 달리는 대한민국 선수를 그려 넣어 역동성을 부각했죠.”
우표는 호평 일색이었다. 덕분에 그리스와 공동으로 우표를 발행할 수 있었고, 국제올림픽위원회(IOC)가 뽑은 우수 우표 디자인으로도 선정돼 동상까지 받았다.
“1989년 발행한 프랑스 혁명 200주년 기념우표에는 프랑스 혁명의 상징인 ‘자유’를 강조하기 위해 1830년 외젠 들라크루아가 그린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을 배경으로 넣고, 그 위를 마치 와이퍼로 닦아낸 듯하게 연출해 그림 일부를 드러냈죠. 왼쪽 위에는 날아가는 새 로고를 배치해 ‘자유’를 한 번 더 강조했어요.”
이 우표는 당시 디자인실에 컴퓨터가 없었는데도 기술적한계를 이겨내고 디자이너의 창의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는 좋은 평가를 받았다. 1999년에는 괴테 탄생 250주년 기념우표를 제작하면서 요셉 칼 슈틸러가 그린 괴테 초상화를 배경으로 정했다. 그보다 더 괴테를 잘 표현한 이미지는없을 것이라는 판단에서였다. 하지만 더 깊이 있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었고, 마침내 대안을 마련했다.
“괴테 대표작 「파우스트」의 마지막 구절을 소형시트에 인용했는데, 이런 걸 보면 우표 디자인이 참 재미있어요. 낱장 우표를 천공한 소형시트나 천공하지 않은 무공시트가 있어서 상황에 따라 디자인 요소를 확장해 나갈 수 있거든요.”

1989년 일본 우표 디자인실 방문 당시

1999년 괴테 탄생 250주년 기념우표 제작 당시
새로운 여정을 시작하다
이혜옥 디자이너는 퇴직 후 새로운 여정을 시작했다. 우표 디자이너 경력을 자양분 삼아 교육자의 길로 들어선 것이다. 처음에는 숙명여자대학교 시각디자인과 외래 강사로 전문교육을 펼쳤다. 그러다가 시선을 넓혀 서울시에서 주관하는 어른을 위한 그림 동화책 만들기 수업인 ‘그림으로 나를 만나다’의 강사로 활동했다. 그는 이 수업을 통해 일반 성인에게 예술의 생활화를 알리는 데 일조했다.

88 서울올림픽 기념우표(1988. 5. 6.발행)

프랑스혁명 200주년 기념우표(1989. 7. 14. 발행)
“자신의 인생을 글과 그림으로 풀어 한 권의 책을 엮어내는 수업이었어요. 20대부터 70대까지 다양한 연령층과 소통하면서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넓어졌죠. 수업을 통해 앞으로 나아갈 힘을 얻는다는 수강생을 볼 때면 덩달아 저도 힘이 나곤 했어요.”
여기서 끝이 아니다. 이혜옥 디자이너는 서울‧인천 지역 아동센터에서 운영하는 사회 돌봄 서비스에도 미술 강사로 참여하며 교육과 예술의 경계를 허물었다.
“그림 놀이는 돌봄 사각지대에 놓인 아이들의 인지 정서 발달을 돕는 수업이었는데요. 아이들의 순수한 반응을 경험할 때마다 다시금 예술의 힘을 느끼곤 했어요.”

서울·인천 지역 아동센터에서 사회 돌봄 서비스 미술 강사로 활동 중인 모습

이혜옥 디자이너의 개인작품 <장릉 연못>
지금 당신은 무엇을 하고 싶나요?
요즘 이혜옥 디자이너는 현대 문인화와 수채화에 푹 빠졌다. 김포에 거주하는 그는 김포미술협회, 김포사생회와 함께 ‘자연과 물’을 주제로 개인 작품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현대 문인화는 선비들이 자신을 돌아보고 마음을 다지기 위해 취미로 즐기던 문인화를 현대식으로 그리는 것인데요. 화선지, 먹, 물감 같은 동양화 도구를 사용한다는 점, 여백을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점, 글과 그림이 조화를 이룬다는 점이 매력이죠. 수채화는 종이, 물감, 물이 만나면서 번지는 수용성과 자연 현상을 이용한다는 점에서 문인화와 비슷해 제 감수성과 일치하더라고요.”
언제나 긍정적인 마음으로 그림을 즐기면서 삶을 더욱 풍요롭게 가꿔가는 중인 이혜옥 디자이너. 그는 예술을 통해 자기 내면을 들여다보기 위해 끊임없이 질문하고 그 답을 그림으로 풀어내고 있다.
“간혹 노년이 다가오면서 우울해하는 분들이 있는데요. 한 번쯤은 자신에게 정말로 하고 싶은 게 무엇인지 물어보셨으면 해요. 저는 그림을 그릴 때마다 ‘무엇을 하고 싶니?’, ‘무엇을 말하고 싶니?’라고 자문하거든요. 여러분도 은퇴 후 자신을 돌보는 소중하고 의미 있는 시간을 보내셨으면 해요. 무엇을 하든 늦은 나이도 늦는 때도 없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