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정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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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0년경 전의감 건물로 쓰이다가 1884년 우정총국으로 사용하던 건물로, 건물 자체가 갖는 의미가 큰 곳이다. 우정 업무를 보던 건물중 세계에서 가장 오래되었으며, 우리나라의 신식 우정 업무를 처음으로 시작한 장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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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정사 기록관‘정보통신의 날’
체신부 내에서‘체신의 날’제정을 공식적으로 제기한 부서는 우정국이었다. 우정국에서 처음 내놓은 아이디어는‘체신의 날’이아닌‘우정기념일’이었다. 1956년, 체신부 간부회의에서 우정기념일 제정 문제가 공식적으로 논의되었다. 기념일을 정하자는 데 반대하는 사람은 없었다.
우정사 기록관연하우표 50년과 쥐띠해의 우표
1957년부터 발행되기 시작한 연하우표는 매 연말 한 해를 정리하고 다가오는 새해를 맞이하는 의미에서 발행된다. 올해로 발행 50주년을 맞는 연하우표는 그간 많은 변화가 있었다. 크리스마스트리와 솔방울을 도안으로 시작된 연하우표는, 우리 민족 고유의 전통 풍습을 거쳐 12간지를 주제로 한 도안에 이르기까지 본래의 목적에 알맞은 도안을 선보여 왔으며, 최근 들어 스티커우표를 비롯하여 야광우표에 이르기까지 그 형태 또한 점차 변화해 가고 있다.
우정이ㆍ온정이의 시간여행6 · 25와 군사우체국
공산군의 기습적인 남침으로 일어난 6·25전쟁은 국내의 산업시설을 잿더미로 만들었다. 피해를 입긴 통신시설도 마찬가지였다. 우체국과 전화국 등 건물은 물론 전화교환시설과 통신선로 등이 철저히 파괴되었다. 80%에 가까운 통신시설이 망가졌다. 한편으로 전쟁은 새로운 제도를 요구했다. 대표적인 것이 군사우편제도였다. 군사우체국은 6·25전쟁이 발발한 지 3개월 만인 1950년 9월 22일에 처음 문을 열었다.
우정이ㆍ온정이의 시간여행‘우편국’이 ‘우체국’으로 바뀐 사연
8ㆍ15 광복을 맞은 우리 민족이 풀어야 할, 가장 시급한 과제 중 하나는 40년 동안 켜켜이 쌓인 일본의 때를 씻어 내는 일이었다. 우선 일본어 사용을 중지해야 했고, 창씨개명 한 일본식 이름을 버려야 했고, 일본식으로 된 관공서 명칭을 고쳐야 했다. 또 일본식으로 된 통신 용어를 개정하는 것도 못지않게 시급한 일이었다.
우정이ㆍ온정이의 시간여행체신문화협회와 <체신문화>
“8ㆍ15로 우리는 그 전율할 일제의 기반에서 해방되었다. 일제가 강요한 문화정책은 이 날로 전복되었다. 우리에게는 파괴되고 박탈당하였던 문화를 재건할 기회가 확실히 오고야 말았다. 가정에서, 학원에서, 직장에서, 모든 기관에서 이 재건의 환호성이 우렁차게 터져나왔다. … 체신사업은 인민 대중과 가장 밀접한 관계에 있고, 그 사업 자체의 전 영역이 문화시설이 아님이 없다. 그러므로 이 문화시설을 인민이 가장 잘 이해하고 이용하도록 지도함이 우리 종업원의 임무이다. 이 임무를 완수함에는 우리 자체가 스스로 교양 훈련하여야 할 것이니 발전 단계에 있는 조선 문화운동은 과거 36년 간 노예화하였던 불순한 일본식 잔재를 청산하고 순수한 민주주의 이념으로 귀일하는 대중문화의 건설이어야 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순수한 우리 기관으로 조선체신문화협회가 결성되었고, 다시 기관지 <체신문화>를 친애하는 3만 종업원 앞에 대담히 내놓으려 한다….” 1946년 10월에 발행된 <체신문화> 창간호에서 체신문화협회 위원장 나맹기는 그렇게 외쳤다.
우정이ㆍ온정이의 시간여행남북우편물, 언제 다시 교환될까
2006년 2월 금강산에서 개최된 제7차 남북적십자회담에서 우리 정부는 국군포로와 납북자의 생사 문제와 함께 이미 상봉한 이산가족들이 계속 연락을 주고받을 수 있도록 우편물을 교환하자고 제의했다. 이에 대해 북측은 묵묵부답이었다. 우리가 볼 때 너무나도 당연한 우리의 제의에 북측이 침묵을 지키고 있는 이유는 뭘까?
우정이ㆍ온정이의 시간여행교통체신부냐 체신부냐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앞두고 발표된 정부조직법 요강에는 행정 각 부가 국무총리 외에 외무부·내무부·국방부·재무부·법무부·문교부·농림부·상공부·사회부·교통체신부 등 10부로 짜여 있었다. 그리고 국무총리 직속으로 총무처·기획처·법제처·공보처 등 4개 처를 두기로 했다.
우정이ㆍ온정이의 시간여행UPU 가입과 국제우편의 시작
신식 우편제도를 도입하면서 조선 정부는 만국우편연합(UPU)에 가입할 생각부터 했다. UPU에 가입하려는 노력은 곳곳에서 드러났다. 고종이 우정총국을 설치하라는 전교를 내렸을 뿐 우정총국이 채 설치되기도 전인 1884년 4월 조선 정부는 서울에 있는 각국 공사에게 UPU에 가입할 뜻을 내비치며 주선해 달라고 부탁했다.
우정이ㆍ온정이의 시간여행우리나라 최초의 등대, 팔미도등대
인천에서 서남해 방향으로 15.7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팔미도(八尾島)라는, 조그만 섬이 있다. 해군 기지가 있을 뿐 민간인이 살지 않으므로 무인도로 치는 섬이다. 그 섬 꼭대기, 그러니까 해발 60미터쯤 되는 곳에 등대 하나가 서 있어 인천항을 드나드는 외항선의 길잡이 노릇을 하고 있다. 우리나라 등대 1호인 팔미도등대다.
우정이ㆍ온정이의 시간여행계속될 문위우표 엔타이어 발굴
우정총국이 폐지된 뒤 5개월이 지난 1885년 3월 주한 일본공사관은 통리 교섭 통상 사무아문에 두 궤짝의 우표를 보내며 대금 지불을 요구했다. 이미 우정총국이 폐지되었고 우편사업을 재개할 계획이 없었던지라, 조선 정부는 대금 지급에 소극적인 반응을 보였다. 국가 재정이 빈약할 때여서 760원이나 되는 우표 대금을 마련하는 일도 쉽지 않았다.
우정이ㆍ온정이의 시간여행오역에서 빚어진 해프닝
앨런이 우리 우표 수집가들에게 관심의 대상이 된 것은 그 역시 우표수집가였기 때문이다. 1895년 6월 1일 우편사업이 재개되었을 때 발행된 우표가‘태극 우표’였다. 태극기를 우표의 도안으로 삼았다 해서 그렇게 불렀다. 태극 우표가 발행되자, 앨런은 태극 우표에 관한 안내문을 만들어 미국 공사의 이름으로 국내외에 알렸다. 그만큼 열성적 인우 표 수집가였다.
우정이ㆍ온정이의 시간여행갑신정변 덕 톡톡히 본 앨런
우리나라 우편의 역사를 아는 수집가라면, 문위우표 엔타이어를 생각할 때 자연스럽게 몇 사람을 떠올리게 될 것이다. 홍영식과 앨런, 그리고 독일인 마이어가 그들이다. 그중에서 홍영식은 일단 젖혀놓아야 한다. 그가 우표수집가였다는 기록도 없거니와, 설사 우표에 관심을 가졌다 하더라도 엔타이어를 남겼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문위우표를 붙인 편지를 주고받았을 가능성이 낮다는 말이 아니다. 의도적으로 그 같은 편지를 주고받았고, 설사 보관했다 해도 남아 있을 가능성이 없다는 말이다. 갑신정변으로 목숨을 잃은 데다 가족마저 멸문지화를 당했으니, 그 같은 기록물이 남아있을 수 없다.
우정이ㆍ온정이의 시간여행문위우표 엔타이어는 어디 있을까
우정이ㆍ온정이의 시간여행체신청의 변천도
우정이ㆍ온정이의 시간여행한국 제2의 도시,부산
부산이 항구로서 대외적으로 개방된 것은 1880년대 중반이었다. 운양호사건을 트집 잡아 강화도조약을 체결하면서 일본은 부산과 함께 인천∙원산의 개항을 요구했다. 서둘러 개항을 요구한 것은 일본과 교역할 무역항이 필요했다기보다 러시아의 남하를 막기 위한 군항을 탐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