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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인생을 살찌운 한권의 책 2]삼국지
글. 이종석 동아일보 논설위원
199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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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을 두고 읽고 또 읽고, 그 속에서 인생의 교훈과 생활의 지혜를 얻는 책 한 권.

이러한 소중한 책 한 권을 간직하며 살아가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보통사람들의 독서습관은 직업으로 책을 읽는 사람을 제외하면 대개가 재미로 책을 읽는다고 볼 수 있다. 교양이 있고 독서에 취미를 가진 사람은 문학이나 철학 • 사회과학 등 고급한 수준의 교양서적들을 읽으며 그 속에서 무한한즐거움을 맛본다. 세칭 베스트셀러의 잔재미에 빠지는 사람, 만화 따위의 저급한 수준의 책에 길들여진 사람 등 독서의 수준은 그야말로 천태만상, 제 분수와 수준에 맞는 책을 읽게 마련이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언문삼국지」는 이처럼 내 직업이나 시류에 상관없이 어려서부터 10여 차례 이상 읽고 내용을 천착하며, 그 속에서 그때그때 적절한 의미도 찾고 교훈도 얻고 있다는데에 각별한 의미가 있다. 어려서 읽을 때에는 유비 • 관우 • 장비로 집약되는 촉한의 중심인물들에 대한 애정이 삼국지의 중심적 관심이 됐었다. 무술도 경륜도 특출할 것 없는 유비가 천하의 인재를 모으고 제갈량의 대방략에 의지한 촉한의 맹주가 되는 것은 한편 의아하기도 하

고 한편 감동적이기도 했다.

나이가 들어 20대, 30대, 40대, 50대를 지나며 읽는 삼국지는 책 속에 나오는 무수한 영웅호걸들의 개성을 비교도 하고 인물마다에 의미를 부여하기도 하는, 다소 분석적인 독서법이었다. 어렸을 때의 몇몇 주요인물들에 대한 애정에 비해 나이들며 읽는 삼국지는 그 많은 인물들이 하나같이 비범한 개성으로 극중의 역할을 하는, 저자의 구성력에 대한 감동이 컸었다.

내가 삼국지를 처음 읽기는 해방 후 국민학교 시절, 할머니의 애장본인「언문삼국지」10권짜리에서 시작되었다. 한문투의 낡은 문장에 띄어쓰기도 하지 않아 처음 대할 때는 한 장도 넘기기 어려운 따분한 책이라는 인상이 지금까지도 생생하게 기억된다. 첫째권「도원결의편」표지에 세 사람의 주인공이 결의 형제를 하는 그림이 있었는데, 책 표지마다 계속되어 나오는 주인공들의 원색 그림의 모습이 50년이 가까워오는 지금까지 마치 한 장의 옛날 사진처럼 내

어린 시절의 기억 속에 판박혀 있다.

할머니는 등잔불 아래 잔 글씨가 보이지 않아 내게 대독을 명령했었다. 동화책이나 만화책이 제격인 국민학교 학생에게 삼국지 낭독은 그야말로 죽을 맛이었다. 한 장도 채 넘기지 못해 졸음이 오고 사지가 뒤틀렸지만 할머니는 내 엄살을 단호하게 일축했다. 게다가 학교 국어시간에 하는 구어투의 낭독이 아니라, 옛날 가사를 읽는 식으로 리듬과 높낮이와 장단을 맞춰 읽는 가사 낭독식으로 읽기를 강요했다. 2시간 가까이 이 곤욕을 치러야 할머니의 강요된 사슬에서 풀려날 수가 있었다.

그런데 이런 곤혹스런 며칠 밤을 지내자 삼국지 내용에 점차 빠져드는 자신을 발견하게 됐다. 한문투의 글도 날이 갈수록 이해의 폭이 넓어지고, 목청을 돋워가며 낭송해 가는 맛에도 점차 길들여졌다. 할머니도 날이 갈수록 늘어가는 장손자의 글 읽는 솜씨가 대견했을 것이다. 혼자 듣기가 아까웠던지 동네 마실꾼들을 모아 함께 듣는 경우가 많았다.

어려서 맛들였던 삼국지의 재미는 관우 • 장비 • 조자룡으로 대표되는 蜀將들의 영웅담에 쏠 릴 수밖에 없었다. 그 중 삼국지의 백미로 꼽히는 것이 장비가 장판교싸움에서 單騎로 조조의 백만대군을 물리치는 장면이다.

‘장판교 다리 위에 살기가 뻗치니

창을 빗긴 말 위의 눈이 이글거리네.

한 소리 크게 외치니 우뢰가 진동하는 듯

혼자서 조조의 백만대군을 물리쳤구나.’

(長坂橋頭殺氣生

橫槍立馬眼圓睁.

一聲好似轟雷震

獨退曹家百萬兵.)

후세에 지었다는 이 시에서 나는 한 인간의 용맹과 지략이 백만대군을 물리치는 역사의 기적을 실감했지만, 관우가 잠시 조조의 진중에 억류되어 있던 중 원소 막하의 명장 안량 • 문추의 목을 단숨에 베어주고 홀연히 유비에게로 떠나는 장면에서는 의리를 목숨 이상의 최고가치로 삼았던 동양 윤리의 전범을 보았다. 이밖에도 장판교 싸움 직후 유비의 아들 아두를 품에 안고 적진을 통과하는 조자룡의 무용 등 어린 시절 삼국지의 재미는 주로 이들 촉장들의 개성적인 용맹과 신의에 갈채를 보내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이들어 20 • 30대에 읽는 삼국지는 또다른 세계의 開眼을 내게 열어 주었다. 첫째로 서서와 방통 등 제갈량에 버금가는 지략가들이 天時를 얻지 못해 좌절하는 비극에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었다. 그 중 진궁의 비극적인 일생은 내게 큰 교훈이 되었다. 진궁은 당초 조조를 따라 나섰다가 조조의 잔학한 성품에 실망하여 잠든 조조를 죽이고 도망하려다 차마 죽이지 못하고 달아났다. 후에 그는 여포와 함께 조조에게 패하여 포로가 되었는데, 그의 재주를 아끼는 조조의 회유를 뿌리치고 여포와 함께 칼을 받는 장면은 불운한 장부의 몸가짐이 어떠해야 한다는 교훈을 내게 가르쳐준 셈이었다.

이밖에도 제갈량의 비장한 만년이나 삼국통일의 대업을 성취한 사마의 중달의 집요한 성격 등 삼국지는 단순한 소설이라기 보다 동양인의 세계관과 인생훈이 응축된 수신 교과서와 같은 책이라고 나는 지금도 믿고 있다. 그리고 삼국지를 열번 읽지 않은 사람과는 진정한 우정을 나누지 말라는, 나와 같은 심국지광들의 갈채에도 나는 기꺼이 동참한다.

젊어서 남독 • 다독의 시대를 지나며 나는 서양의 휘황찬란한 명작 • 명저들에 매몰되어 삼국지를 까맣게 잊고 살던 한 세월이 있었다. 또 삼국지 이외에 수호지, 서상기, 금병매 등 중국 4대 奇書를 섭렵하면서 동양역사의 다양하고 심충적인 세계를 대충 일별하기도 했다. 그러나 나이들수록 우리 인간생활의 전범이 되고 그때그때 답답한 마음을 열어주는 책으로는 삼국지를 능가할 만한 게 없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또한 나는 삼국지를 읽고 생각할 때마다 내게 일찍이 삼국지의 재미를 알게 해준 활머니의 은공을 잊을 수 없다. 그리

고 할머니가 내게 삼국지의 낭송을 강요했던 것은 사랑하는 장손이 험난한 세상을 살아가는 데 이 삼국지가 요긴한 길잡이도 되고 위안을 줄 것이라는 깊은 배려에서였을 게라는 어렴풋한 짐작도 하고 있다. 또한 나는 앞으로 맞게 될 노년기에도 삼국지를 다시 읽으며 이제껏 미처 찾지 못했던 삼국지의 새로운 세계에 도달할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다. 인생의 마무리를 어떻게 해야 하고 인생의 참뜻이 무엇인지를 나는 아마도 삼국지를 통해 찾게 될 것이다.

따지고 보면 삼국지와 나와의 인연은 참으로 미묘하게, 그리고 오랫동안 지속되고 있다. 그래서 나는 한 권의 소중한 책으로 이 삼국지를 서슴없이 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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