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지로 외로움을 녹인 빈센트 반 고흐
<러빙 빈센트>가 열풍이다. 세계 최초 장편 유화 애니메이션답게 10여년의 제작 기간, 배우들을 촬영한 영상을 107명의 화가들이 빈센트 반 고흐 스타일로 그려서 개봉 전부터 큰 화제였다. 하지만 눈길을 끄는 시각적 특이함의 효과는 3분도 가지 못하는 법. 관객들이 영화를 끝까지 몰입해서 볼 수 있었던 이유는, 역시 빈센트라는 개성 강한 화가가 뿜어내는 매력과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던 타살 의혹(빈센트는 자살하지 않았다!)을 전면적으로 제기한 스토리때문이었다. 그것을 풀어내는 얼개도 빈센트에게 어울린다. 그의 진솔한 친구이자 지지자였던 우체부 룰랭의 아들(아르망)이 빈센트가 동생 테오에게 쓴 편지를 직접 전하려는 과정을 따르고 있다. 편지는 빈센트에게 살아서나 죽어서나 아주 중요했다.
편지로 빈센트의 내면과 만나다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 1853~1890)는 서양미술사에서 가장 유명한 화가로 기억된다. 유명세는 작품에 깃든 역사적, 미학적 가치보다는 그의 파란만장했던 삶의 이력에 기댄 바가 더 크다. 그는 그림에 몸과 마음을 바쳤으나 세상은 그에게무관심했으니, 가난을 피할 길 없었다. 영양실조와 외로움, 광기 어린 열중과 과도한 작업량, 캔버스와 현실, 술집과 정신병원을 오가다 37세에 생을 마감했다. 테오의 아내 요한나가 형제가 주고 받은 편지들을 묶어서 출판하면서 ‘자살한 미치광이 무명 화가빈센트’는 유명해졌다. 그림에 대한 정열과 애정, 헌신과 고난등이 생생히 담긴 편지를 통해서 예술가는 가난할수록 작품에 깃든 영혼이 순수하다는 믿음이 생겼고, 그는 예술의 성자가 되었다. 그래서 일부 평론가들은 빈센트의 작품은 보기도 전에 평가는 이미 끝났으며, 감상의 자리는 신화와 유명세의 증거품을 확인하는 절차가 대신하게 되었을 뿐이라고도 한다. 평가는 각자의 몫이다.
파리에서 예술과 미학을 전공한 내게 빈센트는 오랫동안 관심 밖의 화가였다. 하지만 어느 여름날 오르세 미술관 근처 카페 벽에 붙은 빈센트의 자화상에 번개를 맞은 듯 끌려 들었고, 그의 편지들을 읽으면서 빈센트에게 완전히 매혹됐다. 그동안 나는 그의 이름만 알고 있었을 뿐, 그가 어떤 사람인지 왜 그가 그림을 그리는지, 그림이 그에게 어떤 의미였는지 등은 하나도 몰랐음을 알게 됐다. 부끄럽고 미안했다.(따로 표시하지 않은 편지들은 모두 테오에게 쓴 것이다.)
성공은 공짜가 아니다
“너도 잘 알듯이 나는 외모에 신경을 쓰지 않아. 나도 그걸 알고 있고 내 꼴이 충격적이라는 것도 인정해. (…) 그런 데 쓸 돈이나 재산이 없기 때문이야. 게다가 자신의 공부에 깊이 전념하기 위해 필요한 고독을 확보할 수 있는 좋은 수단이기도 해.” - 1880년 7월 테오에게
이것은 세속의 욕망을 스스로 거세한 성직자의 태도다. 그림에 모든 것을 바쳐서 자신을 붓과 캔버스의 경지로 이끌려는 자의 마음가짐이다. 그것을 테오에게 말함으로써 스스로에게 다짐한다. 빈센트에게 편지는 일기장이자 고백록이었다. 현재 남아있는 909통에 이르는 많은 편지를 남긴 그가 일기는 거의 쓰지 않은 이유다. 편지를 쓰면서 미래를 계획하고, 현재를 점검하고, 과거를 돌아봤다. 그러니 편지를 통해 빈센트의 그림이 만들어진 셈이다. 하지만 그것은 공짜가 아니었다.
“마치 형 안에는 두 명의 사람이 있는 것 같아. 아주 재능 있고, 예민하며 부드러운 한 명이 있는가 하면, 다른 한 명은 이기적이고 고약해. 그 두 명이 차례차례로 나타나. (…) 형의 적이 형 자신인 게 너무 안타까워.”
빈센트가 치러야 했던 대가에 대해서는 테오가 여동생에게 보낸 편지에 잘 드러나 있다. 그렇다면 왜 빈센트는 그림에 자기 삶을 바치기로 했을까?
그림 그리는 일이 구원이다
“복음서에는 렘브란트의 무엇인가가, 렘브란트에는 복음서의 무엇인가가 있어.” - 1880년 7월경
전도사로서의 삶이 실패하면서 빈센트는 당시로서는 너무 늦은 나이인 서른 무렵에 그림을 시작했지만, 사람들에게 팔릴 그림을 그려서 내 앞가림을 하겠다고 쓰지 않았다. 애초에 빈센트에게 그림은 돈을 버는 수단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목사의 아들인 그는 말로써 전하지 못한 복음을 그림으로 표현하여, 가난한 사람들의 영혼을 위로하겠다고 밝혔다. 이 무렵에 테오에게 돈을 보내달라는 편지를 썼고, 테오와의 관계는 형제 이상으로 내밀하게 단단해지기 시작한다. 테오와 주고 받은 편지들은 그림과 예술 전반에 관한 빈센트의 솔직한 생각과 의견의 기록물로서, ‘빈센트의 자서전’이라 부를 만하다.
목표가 있는
사람은 성실하지만, 꿈이 있는
사람은 행복하다. 이것이
지금의 우리에게 빈센트가 던지는 핵심 메시지다.
“마음속에 타오르는 불과 영혼을 가지고 있다면, 그걸 억누를 수는 없으니 터뜨리기보다는 태워버리는 게 나아. 안에 있는 것은 밖으로 나가게 마련이야. 가령 나에게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구원이고, 그림이 없었다면 지금보다 더 불행했을 테니까.”
- 1887년 여름 또는 가을 여동생 빌에게 쓴 편지
그림은 타인에게 보여지지만 그림 그리는 일은 자신을 위한 행위였다. 그것은 자기 내면을 형성하고 치유하는 일이었다. 후대의 우리가 ‘반 고흐 스타일’이라고 부르는 화법이 완성되는 무렵에 여동생에게 쓴 편지에서 그는 그림 그리는 일이 구원이라고 밝힌다.
“그림 그리기는 다른 일과 다릅니다 (…) 그렇기 때문에 그 일이 정말 이해되지 않는다고 해도 저는 열심히 노력하고 있습니다. 또 그것은 저에게는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는 유일한 끈이 되고 있습니다.” - 1890년 6월 12일 어머니에게 쓴 편지
자신을 좋아하지도 않고 평생 차갑고 무관심했던 어머니에게 그는 그림만이 자신의 정체성을 형성한다고 선언한다. 그림을 그려야 그는 존재할 수 있는 사람이다. 죽기 한 달 전의 이 편지를 읽으며, 나는 그가 절대로 정신이상자가 아니라고 느꼈다. 미친 사람은 명징하게 스스로를 정의 내리지 못한다.
꿈이 있는 사람은 행복하다
빈센트는 편지를 자주, 길고 꼼꼼하게 쓰는 편이었다. 그림은 캔버스를 마주하고 혼자 그리므로 외로움과 잘 지내야하는데, 빈센트는 기질적으로 외로움을 자주, 강하게 느꼈다. 그래서 그는 편지를 통해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들과 함께 있다는 기분으로 외로움을 녹였다. 하루 종일 그림을 그리고도 녹초가 된 상태에서 편지지로 열 몇 장, 5천 자 이상을 쓸 수 있었던 이유다. 특히 다음 편지에서 빈센트는 자신의 미술관을 집약시키면서 아무리 열심히 그려도 돈을 벌지 못하는 자의 비애를 고난으로 받아들이고, 그것을 더 뜨거운 열정으로 뛰어 넘겠다고 다짐한다.
“사랑하는 테오, (…) 나는 지금 남들이 가장 피하고 싶어하는 사람이 될 처지에 직면해 있어. 달리 말하면 돈 부탁을 해야할 입장이야. 당분간 그림이 팔릴 것 같지 않기 때문에 상황은 더 심각해. 그러나 어떻든 간에 열심히 일하는 게 우리 두 사람에게 최선이 아니겠니? 어떤 문제가 생긴다고 해도, 이럴 때에 앉아서 사색을 하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니? 테오야, 나는 미래를 예언할 수는 없으나 모든 것은 변하게 마련이라는 영원한 법칙은 알고 있어. 10년 전을 생각해보면, 모든 게 너무 달랐지. 환경, 사람들의 분위기, 요컨대 모든 것이 말이야. 따라서 앞으로 10년 사이에도 다시금 많은 변화가 올 거야. 그러나 우리가 한 일은 남을 거고 그렇게 한 사람들은 쉽게 후회하지도 않을거야. 적극적인 사람이 더 훌륭한 사람이지. 나는 게으르게 앉아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 차라리 실패하는 쪽이 좋아.” - 1885년 7월
말은 이렇게 하지만, 제 남동생에게 전적으로 경제적으로 의지한 형의 비애는 가혹하다.
“지금까지 내가 돈을 쓰는 데 너는 불평한 적이 없지. (……) 네가 너무 힘들다면 한 달이나 2주 내에 나에게 알려다오. 나는 즉시 유화를 그만두고 경비가 덜 드는 소묘를 하도록 하마.” - 1888년 4월 9일
“나를 먹여 살리느라 너는 늘 가난하게 지내겠지. 돈은 꼭 갚겠다. 안 되면 내 영혼을 주겠다.” - 1889년 1월 28일
그림을 그리지 않겠다가 아니라, 돈이 적게 드는 소묘를 하겠단다. 뻔뻔하고 무책임하고 염치없다고 비난할 수 있다. 그런 즉각적인 감정의 반응이 지나가면, 부러워진다. 저렇게까지 동생의 눈치를 보고 스스로 쓸모없는 인간이라는 비참함을 감수하면서까지 하고 싶은 일이 우리에게 있는가? 그 일이 자기에게 어떤 의미인지 아는가? 목표가 있는 사람은 성실하지만, 꿈이 있는 사람은 행복하다. 이것이 지금의 우리에게 빈센트가 던지는 핵심 메시지다. 생활보다 생존을 걱정해야 하는 시대니 꿈을 갖기 어려운 시절이다. 하고 싶은 일을 했지만 가난은 피할 수 없었고, 그 둘은 영원한 평행선으로 접점을 찾지 못한 채 죽어간 빈센트는, 자본주의에서 살아가는 하나의 인간형을 대표한다. 그것이 하고 싶은 일(꿈)이 있어도 가난이 두려워 포기하고 사는 대부분의 현대인들이 그에게 강하게 끌리는 이유일 것이다.
“사랑하는 아우, 오늘 너의 편지, 그리고 동봉한 50프랑 지폐, 고마워.”
1890년 7월 24일 테오에게 쓴 편지는 이렇게 시작된다. 이것이 빈센트가 마지막으로 남긴 편지다.
오늘의 편지이야기
사랑하는 동생들에게...
2017대한민국 편지쓰기 공모전
어린이부문 <장려상> 정유나
유진아 내가 5살 때에는 너는 3살이었지. 부모님의 사랑을 독차지한 네가 미웠지만 어떨 때에는 같이 있어준 네가 고맙게
느껴질 때도 있었단다. 우리 서로 싸워서 각자 방에서 반성하고 있었던 날 기억나? 싸우고 난 뒤에 후회가 되더라. “내가 좀 심했구나….” 하고 우리는 금방 화해하고 계속 잘 지냈지.
2007년 3월 27일 내 첫 동생이 되어준 너… 정유진! 우리 자매로 잘 지내자!
2013년 내가 9살이 되던 해, 엄마의 배가 점점 커지면서 임신을 하였다고 그러더라고. 내 동생이 1명 더 생기는 거라니
그때 정말 놀랐어. 유진이랑 밤에 “넌 여동생이 나을 것 같아, 남동생이 나을 것 같아?” “여동생이 좋지!” “그래도 남동생이 있어야 낫지 않을까?” 하며 수다를 떨었는데…. 동생이 기대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또 부모님의 사랑을 빼앗길까봐
걱정도 하였지. 그렇게 지내다가 엄마가 병원으로 가셔서 오지 않으셨지. 유진이와 난 할머니와 같이 있었어. 2013년 8월 7일 네가 태어났어! 내 둘째 동생이 되어준 너… 정유찬! 그래… 남동생이었어.
나와 유진이와 할머니는 엄마를 보러 병원에 갔어. 병원이라는 곳은 정말 신기했어. 엄마는 어떤 링거를 불편하게 꽂고
계셨어. ‘신생아실’이라는 아기 방 같은 곳에 갔어. 너를 보았지.
유찬이 너는 얼굴이 쭈글쭈글하였어. 정말 못생겼었는데 어릴때는 다 그랬대. 나도 그랬나봐.
몇 달 후 네가 우리 집으로 오던 날, 너는 처음 봤을 때 보다 더 귀여웠어. 눈을 감고 잠들어있는 너를 옆에서 바라보고
있었어.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네가 눈을 떴지. 인형같이 귀여운 손, 초롱초롱한 눈 시간이 멈춘 것 같았어. 네가
처음으로 엎드린 날 너무 기뻤어. “아빠! 유찬이도 빨리 크면 나랑 유진이랑 놀 수 있어?” “그럼 놀 수 있지.” 나는 네가 걸어 다니는 날만 손꼽아 기다렸어. 너는 곧 기어 다닐 수 있게 됐어.
집 안 탐험을 하였지. 이것저것 정말 신기했지? 네가 벌떡 일어났을 때도 기뻤어. “이제 조금만 더 기다리면 너와 놀 수
있구나!”하며 신나했지. 네가 드디어 걸어 다닌 날! 나는 너와 놀 수 있는 게 기뻤어. 나, 유진, 유찬 이렇게 삼남매는 잘 놀고 자랐지.
내가 첫째라 너희에게 양보해야 한다는 것이 싫고 짜증났어.
왜 내가 첫째로 태어났는데?! 하며 싫증도 냈었지. 하지만 이제는 그러지 않는단다. 유진아, 유찬아! 어른이 돼서도 서로
사랑하는 삼남매 되자! 내 동생으로 태어나줘서 정말 고맙다.
건강하게 자라줘. 그리고 이 언니(누나)가 항상 사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