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편지는 읽자마자 잊어주었으면 한다. 무엇보다도 제발 내게 편지를 쓰지 말아 줘.
괜히 종이를 꺼내고, 펜을 굴리고, 첫 문장을 고민하는 수고 따위는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바쁜 세상에 그런 느린 마음은 어울리지 않으니까.
그러니 절대로 편지를 쓰지 마. 오늘 하늘이 어땠는지, 길가의 꽃이 피었는지,
문득 내 생각이 났는지 같은 이야기도 굳이 적지 말고.
밤늦게 잠이 오지 않아 떠오른 생각들도 마음속에만 간직해 줘.
그런 사소한 이야기들은 사실 별것 아니니까.
다만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어. 요즘은 어떻게 지내는지. 웃는 날이 많은지.
밥은 잘 먹고 다니는지. 가끔 나를 떠올리기는 하는지. 물론 답장으로 알려주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그런데 이상하네. 편지를 쓰지 말라고 적을수록 네 글씨가 보고 싶어져.
봉투를 열 때의 바스락거림도, 종이 위에 서툴게 남겨진 문장들도 자꾸 생각이 나.
어쩌면 나는 지금 가장 모순적인 부탁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네.
너에게서 받은 모서리가 닳은 오래된 편지를 더 이상은 보관하고 싶지 않아.
그 안에 담긴 우리가 조금도 늙지 않아서 괜히 슬퍼지잖아.
내 말은 듣지 않는 너에게 다시 한 번 말할게
네가 보내는 세상에서 가장 느린 기별이자 가장 오래 남는 마음을 기어코 받고 싶지 않다고.